• 중계본동 104번지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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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eb 07, 2022

    김재경의 PHOTOSSAY 20

     

    중계본동 '백사(104)마을'(노원구 중계본동 30-3번지 일대)이 올 초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서울시와 노원구, 서울주택도시공사(SH)는 '개발과 보전,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상생형 주거단지'(총 2,437세대: 공동주택 1,953세대, 임대주택 484세대)로 변신을 예고(2025년 완공)했기 때문이다. 낡은 저층 주거지의 특성과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는 방식의 개발, 백사마을 만의 차별화된 창의적 건축디자인이 나올 수 있도록 ‘특별건축구역’으로 지정해 부지를 총 28개 영역(공동주택용지 5개, 주거지보전용지 23개)으로 나누고, 총 15명의 건축가를 배치해 각기 다른 디자인으로 건축계획을 수립하도록 했다. 시 관계자는 “백사마을은 재개발로 인한 기존 거주민의 둥지 내몰림을 최소화하는 동시에 도심 내 대규모 주택공급이 가능함을 보여주는 상생형 주거지 재생의 새로운 모델”이며 “다양한 유형의 재생 모델을 지속적으로 발굴, 적용해 낙후된 주거환경을 개선해 나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일제강점기 이후 도시저소득층의 주거형태로 고착된 무허가 불량주택이 서울시 도시화정책 아래 철거민을 양산한 시기는 1960년대. 서울 인근의 적절한 구릉지를 정착지로 택했으며 백사마을이 이들을 수용하는 ‘이주민 정착지'로 지정된 해가 1967년이었다. 용산과 영등포, 청계천 등지에 살던 도시 빈민들이 이곳으로 내몰려 들어왔다. 한 가구당 8평 땅, 시멘트블록 200장, 천막1동이 지급됐다. 그게 전부, 나머지는 각자 알아서 해결하는 식이었다. 해가 바뀌며 이떤이는 뒤 늦게 들어와 터잡이로 살거나 또 누구는 값싼 땅을 매입해 공장을 운영하기도 했다. 저마다의 사정이 딱하지 않을 수 없기는 여기로 들어온 처지를 보아 짐작할 수 있으나 실제로 말을 들어보면 모두 삶이 힘겨운 사람들 뿐이었다. 비록 일제 식민기와 전후의 없던 시절에 어렵지않았던 이가 있을까 십지만 그중에 더욱 갈곳없던 이들이 살던 도심 외곽에 위치한 ‘이주민 정착지’이었다. "첫 이주민이 들어온 후 십여 년 지나자 마을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마을 초입에 시장통이 형성되자 사람들이 붐비고 활기로 가득했다. 하루에 몇번 오는 버스는 길게 늘어선 마을 사람들로 가득찼다. 그 무렵에 전기가 들어왔으나 물은 공동 우물에서 길어다 먹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교통이 불편하고 살림은 옹색했어도 맑은 공기와 자연 속에서 따뜻하고 끈끈한 공동체 생활이 이어졌다."(노원구 소식지)

    “그때 동대문 막살이집촌에 살다가 불이 나는 바람에 집을 잃었지. 판자촌이니 순식간에 재가 됐어. 다른 이웃들과 80여 명이 여기로 흘러 들었어. 나랑 남편도 4남매를 데리고 왔는데 천막 하나 내준 게 고작이었어.”(최ㅇㅇ 88세) “남은 사람 중 여기 계속 살 수 있는 사람은 열에 서너 명도 안될 것”이라며 “새 아파트 추가 분담금이 3~4억원 정도로 예상되는데 실제로 그렇다면 입주권을 팔고 서울을 벗어날 수밖에 없다. 정부에서 융자를 해준다고 해도 나이 먹은 사람은 평생 갚아도 못 갚는다. 이 동네 사람들의 한이 될 것.”(김ㅇㅇ 60세) 주민대표회의 위원장(황ㅇㅇ)은 “분담금 때문에 다른 곳으로 이주하는 일은 어느 재개발이나 다 있다”며 “조합원 분담금도 지금 아파트 시세에 비해서는 엄청 싼 금액이고 차액이 있으니 그걸로 또 집을 장만할 수도 있어서 쫓겨나는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이어 “중도금, 잔금 대출은 SH나 시공사에서 도와줄 것”이라며 “외부인들이 들어오는 것도 있는 사람들이 여윳돈을 갖고 사는 건데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지역, 풍토, 관습 그리고 무엇보다 시간에 따라서 삶의 양태가 다를 수 있다면 주거는 이를 잘 드러내 보이는 것들 중 하나이다. 춥거나 더운 지역은 물론이고 온화한 지역도 생활방식의 차이와 문화는 그 흔적을 그대로 집에 새긴다. 삶이 평탄한 태평시대나 그렇지 않더라도 그 시기 집의 양식, 장식 또는 가구와 집기 등 크게 보아 일상과 예술적 활동의 성과로 남아 후대 사람들에게 말을 전한다. 삶은 고정되기 보다 흔들려 불안한 것이고 사건 사고의 집합은 진보의 노정 그 자체이다. 시대 속에서 부대끼거나 역으로 밖에서 어느 시대를 조망한다는 사실은 현실과 비 현실 만큼 격차가 클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삶의 골격과 살을 이루는 집은 지금 여기 우리의 얼굴 그 자체에 다름아니다 할 수 있다. 몇 십년 동안의 시대적 요청 아래 대량 상품으로 바뀌어 버린 작금의 주거 현실, 누추한 곳을 지우고 아파트단지로 가득찬 도시, 그 바탕의 모습을 기록한다. 처음 관이 주도해 이주민을 소개했던 장소에 주민 스스로 건물을 지었고 섬유질 같은 거주의 원초적 갈망이 보이는 ‘자생적 정착지’로 남은 까닭이다.

    참조 및 인용: <서울시 도시재생실주거재생과 자료>, <서울 중계동 백사마을의 건축적 특성 연구_장용해,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경향신문] [동아일보] [위클리 리포트] 

    _no.80 《와이드AR》 2022년 01-02

  • 15평 짝꿍집(신월6동 이주단지 주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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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eb 07, 2022

     

    김재경의 PHOTOSSAY 19

     

    “1960년대부터 도심을 본격적으로 정비하기 시작했던 서울시 ‘재정착사업’, 외곽지역에 형성한 ‘신월6동 이주단지’는 이런 시책 아래 70년대 초에 형성되었다. 이때 조성된 이주정착지는 80년대로 접어들며 다가구주택단지 또는 재개발지구로 지정돼 아파트단지로 변모해 나갔다. 그리고 후일 재정착 사업의 방향이 바뀌자(주택개량 촉진에 관한 임시조치법) 서울에 조성된 마지막 재정착지로 되었다. 전면철거(2017)된 ’신월6동 이주단지’는 최근 뉴타운재발사업을 완료했다. 

    이곳으로 이주한 첫해(1973)에 집을 지은 이는 없었다. 이주민들은 기왕의 거주처에서 철거한 판자를 수거해 실어다 주는 조건으로 천막 1동을 지급받고 이주정착지조성사업에 동참한 셈이다. 집짓기는 다양한 방법으로 전개되었다. 당시 건축법의 최소대지면적 27평 아래 ‘15평 단지집’은 불가능 했다. 따라서 30평 대지에 1호 주택, 2호 주택으로 건축허가가 진행되지만 동시에 똑같은 형태로 한번에 지은 ‘작꿍집’은 드물었다. 형편대로 일부만 먼저 짓고 나중에 문간채를 짓거나 하는 식이었다. 동네목수와 이웃들이 함께 건축팀을 구성해 집을 짓는 등 상황과 여건에 따라서 ‘15평 단지집’이 건축되는 양상은 각기 달랐다. 30평 대지를 좌,우로 나눠 15평 집을 짝으로 지었다. 총 492개 필지 중 상가는 173필지에, 30평형 40개 필지를 제외하고, 좌우 각각 15평으로 나뉘어 건축된 299개 필지 가운데 속칭 ‘짝꿍집’(데깔코마니 그림처럼)이 된 집이 110개다. 이후 거주민의 편의대로 집을 고치며 변화하기 시작했다. 사정에 따른 변화는 거주민이 주도한 형태로 찾아왔다. 형태를 그대로 유지한 집, 평면이 바뀐집, 대문간의 입면이 바뀐집, 지붕이 바뀌거나 하나로 합한집, 지붕 일부를 증축한 또는 좌우 같은 형태로 전체를 증축한 ‘짝꿍집’, 좌우 분리해 신축한 다가구 형태, 더나아가 아예 좌우를 통합해 신축한 다가구형태 등으로 분화했다. 그리고 2000년대 초반 30평형 3개 필지를 통합해 필로티형 다가구로 신축한 집도 있지만 뉴타운재개발 논의가 진행되며 단지 내 변화의 양상이 멈췄다. ‘신월6동 이주단지’의 ‘짝꿍집’은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연속되는 특이한 골목경관을 연출했다. 이는 특수한 조건 아래 계획된 토지구획 틀이 유지되며 이주민들의 자율적 건축문화가 형성된 사례이다. 약 45년에 걸친 대도시 서울의 변화를 받아들이며 특이한 ‘신월6동’의 경관을 형성했다. 전면 철거(2017.5)되어 이제 그 모습을 볼 수 없으며, 서울 도시-주거사의 한 장면이 되었다. 이주민들을 국공유지에 강제 소개했던 종전의 방식과 달리 서울시의 도시계획적 절차(토지구획정리사업)를 통해서 조성되었다. 토지소유권이 불하되어 자유로운 건축이 가능해 다양하고 역동적인 변화가 일어날 수 있었다.” *

    “이제 역사에 한 페이지로 남을 신월 6동은 지금 이주가 막바지로 90퍼센트 이상 빈집으로 남아있다. 아이들이 어릴 적 뛰어 놀던, 놀이터 신남 초등학교 다니던 아들, 딸들, 중.고등 학교 졸업하고 대학을 다녔던 이곳에서 자식들 결혼시켜 분가한지 얼마 안 되었는데. 정들었던 고향 이웃들 이제 다 어디 가고 나 혼자 남아서 추억을 담고 있나. 이제 다가올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오기 전에 산, 산 이 부서져 버릴 건물들과, 골목 즐거웠던 추억들을. 무엇으로 보상할 수 있을까. 40년 전 목재 학고방 천막으로 지붕을 덥고 작두 우물을 길어다 먹고 살던 어려운 시절, 추운 겨울을 연탄불로 덥혀 가면서, 초상이 나면 골목 한가운데, 연탄을 피우고 천막을 치고 동네 이웃들이 밤을 새우던 이곳 머나먼 싸우디. 아라비아 더운 나라까지 가서 돈 벌어다가 15평 에다 2층집을 짓고 애들과 얼마나 좋아했던 이집 손수 벽돌 쌓고 미장하고 도배했던 이집이 철거 되고, 분담금 때문에 아파트도 못 들어간다니. 슬픔이 쓰나미 처럼 밀려온다.” **

    * 출처: 신월6동 짝꿍집의 건축형태와 변화양상 특성_안화영,이상구(한국도시설계학회지 도시설계 19(3))에서 인용

    ** 출처: 미래사진.(2016년) https://blog.naver.com/mrgs7255/220643761896. 글쓴이의 호흡 그대로 인용

    _no.79 《와이드AR》 2021년 11-12

  • 아현동(阿峴洞), 좋은 집에 대한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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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eb 07, 2022

    김재경의 PHOTOSSAY 18

     

    만리현(萬里峴)과 대현(大峴) 중간의 작은 고개 애고개, 한자로 아현(兒峴)이 나중에 아현(阿峴)으로 바뀌었다. 한성부(성저십리)에 속했던 아현은 소의문(서소문) 밖이라 장례 풍습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도성 안에서는 매장을 금지해 장례 행렬이 소의문, 광희문으로 나갔다. 일제 강점기 경성부는 고시정(후암동)과 도화정, 고양군 신당리, 북아현리 등의 토막촌 인구(1940) 삼만 여명을 홍제정 돈암정 가현정 등에 분산 수용했다 하므로 후일 달동네 형성의 근간이 되었다. 해방 전후에 걸쳐 서울은 이농민과 피난민이 넘쳐 판잣집이 늘었고, 미아리 ‘정착지사업’(1959)이 효과를 보이자 상계 중계 도봉 창 쌍문 구로 사당 신림 봉천 가락동 등 서울 외곽지로 분산(1970)시켰다. 

    서울 도심에 가까운 아현동은 상권을 발전시킨 신촌과 홍대 부근의 인접 동네와 달리 발전이 더뎠다. 중림동과 아현동 사이 막힘없는 차량 흐름을 위해 건설한 굴레방다리는 아현동의 다른 이름 같았다. 한 때 아현고가도로의 준공(1968)은 청계고가, 서울역고가와 함께 서울 근대화의 상징으로 불렸으나 시대가 바뀌자 이 일대에 변화의 바람이 불어 왔다. 마포대로 변 아현뉴타운(2003) 사업과 서대문구 일대를 재개발하는 북아현뉴타운(2005) 사업이 추진됐다. 하루 8만대 차량이 다니던 아현고가도로는 철거(2014) 후에도 정체가 심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됐다. 그리고 작년 북아현1구역 3곳이 입주를 끝마친 데 이어서 곧 시작될 북아현2, 3구역 사업이 완료되면 가구수 1만 여 아파트의 뉴타운으로 재편된다. 

    무더운 여름철에 시원함이 사라진 미역국수는 먹을 수 없었다. 일용직 공사장에서 먹던 참이 생각나 만든 냉국수, 너무 많이 부풀어 오른 미역 때문에 도무지 먹을 수가 없었다. 그곳 사촌이 정착해 살던 70년대 아현동 셋방 풍경은 어디나 비슷했던 다른 동네와 매 한가지였다. 굴레방다리 주변에 꽉 들어찬 집들은 생활비를 보태려 방한칸이라도 세를 놓았으니 도시로 올라온 청춘의 꿈 자리 같았다. 자취방 하숙방 등 각자의 성취를 위한 교두보, 혹은 허기진 영혼의 처소로 적당할 고만고만한 집에 비슷한 처지의 살림살이는 집주인과 세입자 서로에게 흠결 사항이 아니었다. 어떤이는 제집이 아니기에 세들어 살며 도시의 삶을 꾸려야 했고 또 어떤이는 청운의 꿈으로, 그렇게 서울살이는 각자에게 주어진 숙명처럼 받아들였다. 그무렵 시작된 강 건너편 도시개발이 향후 주거에 미칠 영향은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시나브로 삶을 담아내야 할 집이 부동산에 저당잡혀 한낱의 상품으로 변해 갔으며 간혹 턱없이 튀는 서울 아파트 시세는 전국에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자기 소득으로 감당할 수 없는 내집 마련에 대한 현실의 벽은 미래를 어둡게 하고 청년 삶의 희망이 점점 힘을 잃어간다. 집의 효용과 재산 가치의 격차가 크면 클수록 현실의 삶이 시들어 간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그러나 이런 말조차 불편하거나, 오랜 꿈과 노력이 결실을 맺어 곧 새아파트에 입주할 혹자의 부푼 마음에 상처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함께 있으니 이미 내면화 된 증상의 징후는 이중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주성과 집짓기에 대한 고민이 끊이지 않는 것은, 그것이 주거의 원초적 형상에 가 닿아 있기 때문이다.

     

    “집 곧, 

    우리의 내밀한 존재의 지형인 집은, 

    기억을 저장하고 영혼이 거주하는

    어둠(무의식)과 빛(초자아)이 있는 

    지하와 다락을 갖는다. 

     

    뿌리도 하늘도 없는 빌딩과 아파트는 

    컨테이너다.

     

    … 

    탄생과 관혼상제가 제거된, 다만 자아로 팽창되거나 쭈그러든 텅 빈 공간이다. 

    친밀성 없는 집은 형식(크기와 위치)이 가치다.”(이종건)

     

    참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숨 멎은 공간(이종건, 연두)

    _no.78 《와이드AR》 2021년 09-10

  • 인천, 지리적 조건과 시대의 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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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eb 07, 2022

     

    김재경의 PHOTOSSAY 17

     

    조선시대 한양에서 강화도 연미정에 다다른 배는 염하를 거쳐 서해로 나아갔다. 한강은 통진 서남쪽에서 굽어져 갑곶나루가 되고, 남쪽으로 마니산 뒤의 움푹 꺼진곳으로 흐른다. 물속에 돌맥이 뻗쳐 문턱 같으며, 복판이 조금 오목한데 여기가 손돌목이다. 삼남 지방에서 조세로 거둔 쌀 실은 배는 손돌목 밖에서 만조 때를 기다려 건넜고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돌맥에 걸려 파선했다. 고려 때 인주가 인천(조선)으로 바뀌고 조정은 관아를 도호부로 승격했다. 승학산(아후산) 자락의 인천도호부가 문학산을 바라보는 것은 뱃길을 고려한 것이었다. 사모지고개(삼호현) 너머 옥련동 능허대는 사신들이 중국을 오가던 한진 포구가 있었고, 한양 길은 만수동 비루(별리)고개 밖에서 김포로 나가 한강을 건넜다. 근세기 제물포 개항(1883)은 시대의 요청이었고 열강의 압박 아래 일본, 청국, 각국 조계를 정하고 나자 선창으로 물자와 사람이 밀려들었다. 선창에 내리면 해관이 있었고 응봉산(자유공원) '청.일조계지 경계계단’ 아래 한양길 여행객이 묵어 가던 대불호텔, 스튜어드호텔이 마주했다. 해망대(올림포스호텔 자리) 곁의 선창은 후일 그곳을 객선부두, 연안부두(1973)라 불렀으나 월미도 소월미도 사이에 갑문을 설치(1918)해 내항을 건설하며 사라졌다. 중구청(일본영사관) 앞 중앙동 일본제1, 제18, 제58은행 길 본정통은 한 때 도쿄 중심가 못지않은 풍경을 연출했다. 문학에서 이십리길 제물진은 개항과 더불어 경성가는 새길이 필요했다. 경동 싸리재 너머 쇳불고개(우각로)를 지나는 경인가로와 제물포-노량진 간 철로(1899)는 갯골을 피해 택한 필연의 코스였다. 그리고 탁포(조선인 포구), 청국인 푸성귀시장(신포시장) 너머로 조계가 확장되자 터잡이는 점차 철길 너머 동구쪽으로 밀렸다. 전후 배다리시장은 송림동, 숭의동 피난민들로 넘쳐 났고 수돗물이 부족해 한강에서 물을 끌어왔던 수도국(산) 주변은 그 당시 삶과 흔적을 잘 보여 준다. 더욱이 일제 때부터 기계, 방적공장, 정미소 등이 있던 만석동, 화수동도 매 한가지 어렵던 시절 서민 삶의 날것 그대로의 현장이었다. 복개(1990) 전 동인천역 앞 갯골은 화수부두의 수문통으로 이어졌고, 밀물 때 화평파출소 앞까지 작은배가 들어왔다. 송림초 앞에서 송림오거리로 가는 길이 확장되자 배다리시장은 자유시장(중앙시장)에 흡수됐다. 그시절 인천 모둠살이는 중앙시장, 배다리, 우각로 주변 그리고 영화학교, 창녕초등학교에 남아 전해졌다. 3.1운동의 첫 만세를 부른 창녕초등학교(인명학교-인천공립보통학교), 그 옆에 있던 의성사숙(서당)은 미학자 고유섭의 유년시절 배움터이었다. 초기의 입국자들은 선교와 교육열, 무역과 투자 흔적을 곳곳에 새겼고, 주한미국공사 알렌 별장(전도관 자리) 아래에서는 경인철도 기공식과 우각리역을 두기도 했다. 동인천과 주안역 사이 구간이 넓어 이용이 불편하자 숭의동, 도화동 주민의 편의를 위해 간이역(제물포역)을 설치(1959)했다. 강점기 일본이 주안에 염전을 만들어(1907) 성공하자 1920년대부터 남동, 소래, 군자염전은 전국 소금생산량의 60%를 담당했으며 후일 주안염전이 문을 닫자 그자리 60여 만평 신개발지에 공단이 들어섰다. 석바위(석암장)는 장이 서고 하룻밤 쉬어갈 주막도 있던 곳이라 예부터 서울가는 길목이었다. 이런 경인가로 주변에 주택과 빌딩이 들어선 것은 '인천도시개발 5개년 계획'(1965) 부터다. 중구, 동구에 집중된 도심 기능을 외곽으로 분산시키는 인구 100만 시대의 대비책이었다. 주안염전 자리의 북쪽은 공단, 남쪽 논밭은 시가지로 정비해 주안역 중심의 새 도심을 조성했다. 이때 주안사거리에 들어선 시민회관(1974)은 공연과 문화행사 뿐만이 아니라 영화도 상영했다. 시민회관 사거리의 인천5.3민주화운동과 일제강점기 부두노동자들이 발화한 한국 노동운동 또한 인천에서 비롯되었다.  

    "한강에서 운하를 파 주안 갯골과 연결시키면 '염하'를 거치지 않고서 배가 직접 한강으로 들어올수 있다”던 김안로(영의정 중종)의 견해는, 후일 일본이 서울에서 가깝고 철도와 항만을 갖춘 인천의 부평에 조병창을 설치한 것으로 입증된 것일까. 만석동 인천기계제작소에서 잠수정을 건조했던 사실은 비록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 육군의 고육지책(해군과의 불화)이었지만 후일 한국기계공업의 초석으로 작용했다. 한국전쟁에 맥아더 연합군은 월미도로 상륙해(9.15) 경인가로를 지나 부평과 김포를 접수한 후 서울을 수복(9.28)했다. 이때 해병대원과 함께 북성포구(레드비치)로 상륙한 마거리트 히긴스*는 이듬해 여성 최초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일본이 청.러, 중일전쟁을 위한 거점도시로 키웠던 도시 인천의 항동, 주안공단, 남동공단 일대는 모두 매립지다. 이런 바탕 아래 동서 방향으로 몸을 불리던 인천이 시청사를 구월동에 옮기며(1985) 연수구, 남동구를 잇는 남북 축으로 도시 공간을 확장했다. 그에 더해 인천경제자유구역(IFEZ)의 빛나는 성과와 서구 청라지구의 도시개발은 미래 인천의 야심찬 도약일 것이다. 

    비류는 미추홀* 도읍을 문학산에 두었다. 주몽을 도와 고구려를 창업했던 어머니 소서노, 온조와 함께 본토를 떠나 세운 나라였고 후일 동생 온조의 위례 매소홀*, 즉 백제에 흡수된 지금의 인천 땅이다. 지리적 조건이 해상으로 열려, 고구려 신라 사이에서 백제가 중국과 해상 무역을 중요시 했던 곳이었다. 문득 법을 찾아 당나라로 가려던 의상과 원효의 뱃길이 궁금했다. 기록에 당은포는 지금의 화성시 서신면, 바닷가가 아니었다. 거기 당(항)성 포구는 내륙으로 깊숙한 곳이며 물길을 따라 들어왔던 중국 배를 타려던 셈이고 고구려 쪽 육로가 막히자 떠올린 대안이었다. 이처럼 지리적 조건과 시대의 케미는 한때 과거 일로 그치지 않고 언제 어디서든 다시 반복된다. 일상의 무대는 여행의 일탈과 달리 삶 그 자체 이듯이, 지난 시간을 따라서 인천 구도심의 변화와 일상의 한 결을 살펴 보았다. 인구 293만 명(3위) 도시 인천, 이제 확장보다 순환을 고민할 시점이다. 어쩌면 예전의 청정한 갯골이 일상으로 돌아오는 날, 봄 기운도 찾아올 수 있을까. 마치 등잔 밑에서 찾을 반지처럼 모를 일이다.

    * Maguerite Higgins(1920~66): 뉴욕 헤럴드 트리뷴 종군기자, 아일랜드계 홍콩 출생 미국인, 베트남전쟁 종군 중에 병사. 미국군함이 강화도에 쳐들어온 신미양요(1871)의 펠리체 베아토, 러일전쟁의 잭 런던 등 한국전쟁의 270여 종군기자 중 가장 빼어난 활약을 펼쳤다. <WAR IN KOREA> 출간과 더불어 국제사회에 한국을 위한 도움을 호소 함.

    * 미추홀彌鄒忽: 추모왕의 축복이 두루 널리 지속될 것을 약속한 땅. / 매소홀買召忽: 소서노가 마한으로 부터 구매해 얻은 땅. (조선상고사, 신채호 _한국 도시디자인 탐사 p457)

    참조 : 택리지(이중환, 을유문화사), 시간을 담은 길(배성수, 글누림), 인천 100년의 시간을 걷다(이연경 문순희 박진한, 북멘토), 조리개속의 도시 인천(전진삼, Spacetime), 한국 도시디자인 탐사(김민수, 그린비), 인천 에코뮤지엄플랜(2018 배다리 도시학교), 문학산 역사관(인천광역시 미추홀구), 탁포사람들(인천광역시), LIFE(October 2, 1950), 인천의 어제와 오늘(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kkkk8155), agust의 軍事世界(https://blog.naver.com/xqon1/222323551990)

    _no.77 《와이드AR》 2021년 07-08

  • 부산의 원도심 동래, 자성대와 부산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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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un 25, 2021

    김재경의 PHOTOSSAY 16

     

    날이 저물어 영도다리 아래서 배낭을 챙겼다. 생약 파는 점포 안에서 두 남자가 막걸리 병을 내려놓으며 나와 눈이 마주쳤다. 배경 선반에 말린 약재자루가 가득이 정돈되어 있어 뭔가 느낌이 왔지만 걸음은 이미 떼어논 다음. 지나치던 발걸음을 되돌려 정중히 사진촬영을 청했다. 이런 순간을 그냥 흘려보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크레타 섬에서 지중해 주변 도시국가로 번진 힘이 동쪽으로 움직였다. 그 힘 알렉산드로스의 동방정복은 인도에서 멈췄고, 아시아 극동지역에서 또 다른 힘이 솟구쳤다. 거꾸로 보면 일본이 대륙을 향한 길에 조선이 놓였고 그 길목이 부산지역인 것이 화근이었다. 선사시대 이래 교류에도 불구하고 잇단 왜구의 노략질은 조선이 동래현에 진을 설치(1397)하게 작용했다.대마도정벌(1419)로 일본과 교역을 끊거나 또 삼포(부산포, 울산 염포, 창원 제포)를 열어 두 나라 사이의 무역을 유지했다. ‘넉넉한(富山) 고장’(東萊富山浦之圖 해동제국기 1471), 이름 글자에 변화가 찾아왔다. "부산(釜山)은 동평현에 있으며, 산이 가마꼴 같아서 이렇게 이름 했고 그 아래가 부산포이니, 늘 살고 있는 왜호(倭戶)가 있으며 북쪽 현까지 거리는 12리이다.”(신증동국여지승람 1481) 자원이 넉넉했던 부산(富山)이 가마솥 모양(釜)의 산山 아래 부산포의 장소성(경제, 외교, 군사)을 강조한 부산(釜山)으로 바뀐 것이다. 

    한편, 일본은 도요또미 히데요시가 권력을 통일(1580)하자 힘을 국외로 돌려 조선을 침탈(1592)했다. 부산진(자성대)과 동래성을 짓밟고 한양을 접수한 후 평양에 머물던 왜군이 조명연합군에 밀린 것은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해상 보급로를 틀어 막은 채, 왜군의 교두보 부산포에 큰 타격을 입혔던 이유도 있었다. 지금의 좌천동, 문현동, 우암동 해안가에 있던 적선 백여 척을 깨부순 것이고 왜군이 웅천 등 곳곳에 성을 쌓으며 전략을 바꾸도록 했다. 이후 전선이 교착되고 정유재란으로 이어졌다. 근대기, 일본이 명치유신(1853~77) 후 대륙침략의 기회를 노려 운양호사건(1875)을 일으켰다. 부산항에 들어온 일본 군함이 남해안과 동해안 탐측, 시위 후 강화도를 무력 침입한 사건이다. 이로써 조선정부를 압박해 강화도 조약(1876)을 체결했다. 그 즈음의 부산은 "전체가 네 개의 구역으로 뚜렷이 구분된 도시”.* 즉 초량왜관의 일본인 전관거류지(1877), 동래읍성 지역, 영선산 일대의 유럽인 거주지, 조선인 토착민들이 거주하는 부산진 포구를 뜻했다. 용두산(송현산) 동편과 서편에 걸쳐 있었던 초량왜관, 조선시대 왜인 통제를 위한 구역이며 동관 3대청(관수옥, 개시대청, 재판옥)과 빈번소 등 관청 건물이 해안선을 따라 위치했다. 개항기에 일본인 거류지로 사용되었고, 일제강점기에는 식민통치의 중심지로 산 정상에 '부산신사'를 두었다. 광대한 매축공사(1902~1934)는 영선산을 깎아 얻은 흙으로 부산 앞바다의 지형을 바꿔 나갔다. 경부선 철로 부설을 위해 자성대 아래 부산포 일대를 메운 것도 그즈음. 북항 주변과 중앙동 땅이 그렇게 생겨났으며, 용두산에서 용미산(龍尾山) 자리로 옮겨 앉은 부산부청사(1936)는 해방 후 부산시청사로 사용되다가 연산동에 새청사를 신축해 옮기자 지금의 제2롯데월드가 들어섰다. 군면통폐합(1914) 때 부산부(초량, 부산진, 영도)가 동래군과 나뉘며 세운 영도다리(1934)는 이런 역사의 일부분, 옛 부산의 기원지로서 자성대와 부산포 일대에는 '가마 부’산釜山의 장소성이 깃들여 있다.

    "흰 모래 푸른 솔의 해안, 종일 파도 뿐인" 삼천삼백여 명(1876)의 작은 어촌이 근대적 항구의 기능을 갖추기 시작했다. 전형적인 식민지 항구도시는 근대화 이전의 경제를 그대로 안은 채 일본 제국을 연결하는 무역항으로 발전됐다. 한국인 이만팔천, 일본인 이만오천(1910)의 도시는 경남도청이 진주에서 옮겨 오자 이십만명으로 늘지만 그 중 육만이 일본인이었다.(1936) 그리고 일제의 대동아공영권, 허망한 꿈은 패전으로 끝이 났다. 해방이 되고 인구 28만(일본인 5만명 귀국)이 오십만(1948)을 넘어서지만 상공업이 마비된 이 기간의 부산은 콩나물 시루 같았다. 그리고 전후(1955) 백만이 넘자 부산은 온통 판잣집이었다. 중부 만사백, 서부 삼천, 영도 칠백, 초량 삼천, 부산진 이천, 동래 육백 모두 합해 이만채였다. 이런 판자촌 대화재(1953)로 부산우체국, 부산역, 부산일보, 부산방송국을 포함한 공공건물과 삼천여 채의 집이 타서 없어졌고 육천세대 삼만여 명이 이재민이 되었다. 기름종이를 지붕에 덮은 목조건물이 불타고난 자리에 새건물이 들어서는 조건은 충분했다. 현대식 건물이 가득찬 지금, 부산의 옛모습을 볼 수 없어도 지층에 새겨진 원도심이 북항, 부산역, 남항, 영도지역 임에 틀림이 없다. 

    폭이 넓은 복도에 평상까지 놓여, 마치 한가한 동네의 골목을 닮은 영선아파트. 마늘이 담긴 양파자루와 시래기는 벽에 매달려 있고 주민들은 한담을 나눈다. 재개발이 한창인 옆 단지에 좋은 집이 많았다는 매축지마을 할머니, 얼마 전에 잃어버린 쇠종 얘기를 꺼낸다. 짐작에 외부인보다 사정을 아는 이의 소행인 듯하며 이곳 대부분의 집(외지인 소유)들은 비었다 했다. 영도다리목 생약재상에서 만나 술잔을 건네던 이의 말도 귓전을 맴 돈다. “부산의 원도심은 동래입니다.” 그는 동래사람이었고, 문화적으로 ‘상혼’이라는 말이 동래부를 우위에 두고서 혼사를 논했던 옛날식 표현이고 보면 이처럼 제 고장 사람들의 자부심을 잘 드러낸 표현도 없을 듯했다. 양피지 위에 덧쓰여진 글처럼 땅과 사람과 시간이 직조한 무늬를 따라서 초기 부산의 도시구조를 살펴 보았다.

    * Charles Louis Varat(1842~1893) : 프랑스 여행가, 지리학자, 민속학자 

    참조 : 임진왜란(이장희.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부산포해전의 승리요인과 위상(임원빈. 이순신연구논총 제32호), 한국의 발견 부산(한창기. 뿌리깊은 나무), 한국 도시디자인 탐사(김민수. 그린비), 팬저의 국방여행(http://panzercho.egloos.com)

    _no.76 《와이드AR》 2021년 05-06

  • 종삼(鐘三)의 기지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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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eb 08, 2021

    김재경의 PHOTOSSAY 15

     

    얼었던 흙에서 기운이 솟아 오른다. 시내물 흐르는 소리는 동면의 개구리를 깨우고 들판은 초록 옷을 입는다. 이렇듯 생명이 움트는 힘은 무엇이며 어디서 오는가. 자연의 신비는 수수께끼나 사람의 도시는 동력이 필요하고 연소재로 물질을 태워야한다. 오래된 골목길에 다양한 상권을 지닌 도심지 구역이 변신의 과정에 있다. 반세기에 걸친 쇠퇴의 길에서 벗어나려는 탈각의 진통이다. 

    한성과 서울의 중추 종로거리의 성쇠는 강남시대의 부흥과 반비례하는 도시역사를 공유한다. 일제강점기 경성은 도시계획으로 시구개정사업(1912~18)을 시행했다. 조선시가지계획령(1934)에 따른 토지구획 정리사업은 도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2차 세계대전 시기 공중폭격에 대비한 ‘소개공지’를 조성했다. 폭 30~50m 긴 띠를 이루는 빈 터 소개공지는 공습 때 도시의 화재를 저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경성부(서울시)는 종로, 동대문, 회현동, 신당동, 갈월동, 충정로 일대의 6개소를 지정해 그 중 종묘앞~필동간(세운상가 지대) 1개소만 6월에 철거를 완료했다. 그 해 1945년 8월 일본이 패전했기 때문이다. “종묘 앞에서 필동, 경운동~종로의 소개도로에는 입추의 여지없이 판자집이 들어 찼으며 사창私娼의 집합처가 되었다. 1950년 대부터 68년까지 이 곳을 중심으로 종로 2가~5가 일대는 ‘종삼’ 또는 ‘서종삼’ 이라 불렸다.”(손정목) 대부분 일본인 소유지던 이곳은 전후의 곤궁한 사정 아래 천막과 루핀 지붕의 서민 판잣집이 점유했다. 한 눈에도 추레하게 보였던 이곳을 중구청이 나서서 정리를 위한 기획안을 세웠다. 대통령의 재가를 얻은 시장의 추진력은 불도저 같은 힘을 발휘했다. 한 때 국회의사당 후보지로도 논의된 바 있던 이 소개공지는 도시계획가로 ‘광로 제3호’로 이름한 도시계획으로 발전해 ‘세운상가’군을 건설했다. 현대상가아파트의 준공(1967)은 앞으로 “서울의 상가경기 중심지는 그동안 종로-명동-소공동-무교동의 순으로 이동을 거듭, 멀지않아 이 (세운)상가아파트지역으로 옮겨 갈 것으로 내다 보고 있다.”(동아일보) 그러나 연쇄상가, 백화점식상가, 아파트로 구성된 세운복합상가의 인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70년대 초로 들어서며 한강맨션의 준공과 강남개발, 신세계백화점과 미도파백화점의 약진은 서울 중심상권이 충무로-명동으로 기울게 했고 연이어 롯데백화점까지 개관하자 점차 주변부화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전자제품, 악기 전문점이 많던 이곳에 청계천, 을지로 일대의 교통난이 겹치자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설상가상 용산에 전자상가가 들어서면서 부터는 세(상의 기)운이 더욱 기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재개발사업계획에 대한 1979~87년의 첫 시도에 이어, 2004년 ‘녹색’ 개발사업, 그리고 2006년 ‘세운녹지축 조성사업’은 종묘앞 도로면에 접한 현대상가를 철거했다. 그러나 계획이 바뀌고 2009년에 보존, 존치관리구역 지정 결정 후 2014년 주민과 함께하는 상가군의 활성화로 추진 결정되었다. 2017년 재생사업을 거친 후 청년 창업·벤처기업이 입주했다. 세운상가 기술인과의 협업으로 도심 제조업 전진기지로 조성하는 단계적 기획사업이다. 2020년 서울시는 세운재정비촉진지구 내 정비구역 해제 및 연장(안)을 결정, 사업시행기간(14.3.27~19.3.26) 5년 동안 지체사유가 인정될 경우 2년 연장이 가능한 상태이다. 향후 ‘2025 서울도시재생전략계획’과 ‘2030 서울플랜’을 거치면 중심지체계가 다핵구조(광화문-세운지구-동대문)로 전환될 태세이다. 

    사회 초년시절 회사에서 필요한 사진용품이나 전자부품을 구하러 나오던 종로3가는 내게 익숙한 곳이다. 그새 강산이 많이 변했으나 언제 방문해도 눈에 익어 안도와 소외가 교차하는 이 일대가 쇠퇴와 변화의 길에서 엉거주춤한 모습이다. 세운상가 양편의 동네 종로3.4가 장사동 예지동 입정동 산림동 초동 인현동 을지로3.4가 충무로 일대는 골목이 잘 보전되어 다양한 업종과 상권이 형성된 곳이다. 어쩌면 타국의 여행지 오래된 가게에서 받은 인상이 좋았다면 이런 점이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선형적으로 흐르는 역사의 시간에 성공과 좌절의 기록은 그 시대 뿐만이 아니라 후대에 교훈을 주며 여기엔 개인의 기록도 편입되기 마련이다. 부침의 흔적을 읽어 지난 시기를 재구성해 미래를 그리는 점에서 역사는 우리의 선생이다. 이 즈음의 상황이 관전자의 눈에는 지난 시기 과밀한 강북의 대안으로 추진했던 강남개발의 여파를 상쇄하는 것으로 보인다. 보전과 부분적 개발은 과거와 현재의 화해다. 서로를 존중하며 공존할 수 있는 방식이다. 남은 과제는 한 쪽이 밀려나지 않도록 신의를 잃지 않는 일이다.  

    참조 : “아! 세운상가여! 재개발사업이라는 이름의 도시파괴”(손정목. 국토) [서울 정책아카이브] [한겨레]

    _no.75 《와이드AR》 2021년 01-02월호

  • 도시마을, 덕천동과 미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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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eb 08, 2021

    김재경의 PHOTOSSAY 14

     

    안양천과 학의천 합류지에 있는 안양7동, 그의 일부 덕천마을은 지금 없다. 1977년 대홍수로 안양이 이백여 명의 사망자를 낼 때 그 중심에 있었고 그래도 여전했던 이 마을이 아파트단지(2016)로 바뀌며 기억의 저편으로 옮겨갔다. 여기서 뛰놀던 아이들과 이웃들의 소소한 이야기는 벌써 배경이 희미한데 이 마을에 터잡고 살아온 사람들의 사연들이 궁금했다. 과천군 하서면 안양리(조선시대)는 안양사安養寺(만안구 석수동)에서 지명을 얻었고, 철도 경부선(1905)이 놓이자 안양역 중심으로 도심을 형성했다. 1960년대 산업화의 물결은 1호 국도(경수산업도로)와 철로 주변에 크고 작은 공장들을 불러들이고, 덕천마을 남쪽이 공업지대로 변하며 주거지역이 형성되자 준공업지역으로 변모했다. 시로 승격(1973)된지 얼마 지나지않아 안양시의 벌터坪村가 안양천의 범람으로 수해를 입자 수재민촌으로 불렸지만 후에 덕천마을(德泉洞)로 개칭되었다. 그래서일까 이곳엔 유난히 특이한 건물이 많았다. 유형 뿐만이 아니라 건축법의 저촉 없이 지어진 건물은 실물이 아니라면 때가 될 때까지 사진으로 남겨야할 이유는 충분했다. 과거의 어떤 것이 현재 속에서 다시 복원되어 완성되지 않은 형태로 드러나는 “역사의 기원”(벤야민)처럼 말이다. 재개발 시한이 다가오자 마지막 겨울채비로 김장을 담그던 이도, 덕천장 중국집 아저씨와 자전거 수리집 할아버지도, 믹스커피를 나누었던 표준설비집 어른도 더할 말이 하나쯤 있겠다. 이처럼 마을은 익명의 개인들이 교감과 소통이 자유롭던 곳이며 공간의 구조가 다양하고 뒤섞여 잎맥처럼 발달한 길은 돌아 가더라도 또 이어져 그 길이 하나가 아니었다. 반면에 그래서 통제가 어렵다는 이유로, 골목길을 없애고 대로를 만들어 혁명을 잠재우고 감시가 수월한 공간 구조적 형식을 만들어 통제사회를 구축한 과거의 사례도 있었다. 최강의 한파로 모두 꽁꽁 얼어붙은 겨울날 덕천마을의 한 청년이 문앞에 쌓인 눈을 치우려 빗자루질 한다. "내집 냅둬!" 그 행위가 사람이 산다는 표시에 다름 아닌데 입은 옷이 너무 허술했다. 한파로 배관이 얼어터져 이불이 젖고 때거리도 없다는 말에, 포대 쌀 외에 도울 방법이 없다는 동사무소를 나와 전기장판과 낡은 이불을 구해 건넸다. 그때 이후로 청년의 재정착에 관련해서 지금 아는 바 없지만, 그 무렵부터 집들이 헐려나가기 시작하자 길냥이들의 밥차가 들어왔다. 퇴근 후에 온다는 소녀는 사람이 떠나고 남은 고양이들을 잊지 못해 발걸음을 멈출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인심 살아있는 도시마을들이 개발논리 앞에 설 곳을 잃는다. ‘난쏘’(조세희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1978)에서 보았던 산업화의 어두운 면처럼, 마치 역사의 비극이 또 다른 소극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말이다. 2002부터 2008년까지 전국적으로 50개 지구로 확산되어 추진했던 ‘뉴타운 개발’은 기성시가지에 대한 재개발방식이다. 공공이 원하는 민간사업으로 적정규모의 생활권역, 충분한 도시기반시설을 동시에 확충하는 종합개발사업이다. 난개발의 지역간 격차를 없애기 위해 추진했으며 기성시가지에 대한 재개발방식에 다름 아니다. 신시가지형 은평뉴타운, 주거중심형 길음뉴타운, 도심형 왕십리뉴타운 3개 지구로 시범지구를 지정해 시작했다. 그러나 뉴타운지구 지정 이후 지분가치가 상승한 상태에서 금융위기(2008)를 맞아 사업추진이 멈췄고 원주민 재정착율과 사업정당성의 문제는 거주자 중심으로 지구지정 해제를 요구하며 그 대상과 범위가 축소되었다. 단기간 내 너무 많은 지역을 대상으로 추진해 생긴 문제가 작용했기 때문이다. 도시개발로 얻는 긍정적인 면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현재적 욕망을 표출하는 점에서 지대의 상승은 개발이익이 반영된 것이며 필경 그 주변에 영향을 주게 마련이다. 건물과 임대료는 물가에 반영되고 크게보면 시민의 입장에서 별반 차등이 없다는 견해도 있다. 또 불가분 재산가치의 변동에 따라 보유세 증가는 당연한 반면 그 집에 계속 살아가야할 소유자에게는 낼 세금만 늘어나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힙hip한 도심지와 변두리 대비 지대의 상승이 등비례하지 않는 한 그리고 지방과의 격차가 심할수록 현금가치는 위력을 발휘할 것이다. 주거비용이 실제의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큰 현실적 장벽 앞에 다주택 소유자가 아닌 한 내집은 현실의 삶을 살아야하는 곳이며 무주택자의 시름은 깊어질 뿐이다. 때문에 재산가치에 대한 환상은 일종의 착시현상이며 진정 모두를 위해서는 납득할 만한 수준이 좋은 것이다. 

    근대는 투명한 과학적 사고로 무장해 세계를 균질하게 나누고 밝히며 문명에 일조했다. 이성과 합리적 이해로부터 누락된 야생의 사고는 비과학의 처지로 내몰리는 수모를 겪었고, 그렇게 쌓아 올린 세계는 아성이 되었으며 끊임없이 새 것으로 머물지 못할 때 근대(모더니티)가 아니듯이 쇠락을 피치 못하는 사물의 운명은 근대성의 숙명과 어느 정도 닮았다. 우리의 경우 압착된 역사적 시공간을 살아내며 연출한 도회적 모습은 현재적 삶을 그대로 반영했다. 시대와 더불어 도시의 진화는 우연적 형태로부터 필연적 도시 형태로 발전했고, 그 도시화는 은연중 거대함을 선호하는 경향성을 띠며 사회적 흐름을 보였다. 반면에 "다락과 지하실이 없는 곳은 집이 아니다"는 집의 '원형적 가치'를 일깨운 바슐라르는 기억이 머무르는 장소로, 알 수 없는 미지의 곳을 떠올렸는지 모른다. 어쩌면 이처럼 적당히 외진 곳, 상상력이 잉태되는 공간이면 어디라도 좋을, 그래서 자신을 숨길만 한 곳에서는 상상력이 발동하는 순간의 중요성 말이다. 이런 점에서 어둠은 빛의 배경이며 꿈을 잉태하기 알맞은 환경을 제공한다. 개개인의 성취와 성공의 원인인 꿈은 미래를 보증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또 꿈은 자본주의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일종의 환상 차원의 이데올로기적 효과(환등상)로 기능하며 유토피아적 소망상을 내포한다. 그렇기에 집합적 꿈(의식)이 나타난 세계로서 우리 사회는 지금 부동산 중증에 시달리는데 과거의 어떤 것이 현재 속에서 각성의 형태로 나타나는, 강남풍의 미몽에서 깨어날 '집합적 각성'을 생각해 볼 때이다. 

    참조: 안양시 자료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아파트 한국사회, 박인석, 현암사>, <베를린의 유년시절, 박설호 편역, 솔>, <사회과학 명저 재발견 3, 전재성 외 9인,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_no.74 《와이드AR》 2020년 11-12월호

  • 주거의 조건과 젊은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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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eb 08, 2021

    김재경의 PHOTOSSAY 13

     

    집 값이 너무 오른다. 서울 강남의 아파트 시세가 뛰면 덩달아 타지역의 집 값이 오르고 못가진자들의 내집마련 꿈은 점점 시들어 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아파트단지들은 삼사십년이 지나서 노후해 질 경우(연한이 찬 아파트단지마다) 용적률을 상향 조정하지 않으면 재건축이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이미 과포화 상태에 다다른 아파트단지의 사업성과 타당성이 낙관적일 수 없을 뿐만아니라 면적을 늘리고 더높이 짓기 위해 그 때마다 법적 규제완화를 요구한다면 이는 '아파트 공화국'의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이런 마당에 새내기의 결혼 기피현상으로 인구는 줄고, 부차적으로 주택수요가 안정될 긍정적 요소가 있지만 향후의 재건축을 회의적으로 보는 이유는 동력(사업성)을 잃는 순간 아파트단지의 슬럼화는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전후 재건의 시대에 도시 서울로 몰려드는 시민들을 위한 주택이 부족하자 관이 주도해 급히 추진했던 주택공급의 유형인 예의 시민아파트는 부실하게 지어졌다. 성과에 치우쳐 공사기한을 당기고 더욱이 건축 자재도 부실해 와우아파트가 무너졌다. 이 붕괴사고는 그때까지 논의 되던 강남개발에 불을 지펴 한강의 남쪽 '영동지구 신시가지 계획'을 시작으로 대규모 아파트단지 조성이 민간건설회사의 참여로 추진되었다. 서울시는 대규모 신시가지 조성을 위한 재원을 토지구획정리사업에서 발생하는 체비지 매각에 의존하는 한편 건설회사에 보장해 준 수익형 인센티브는 준공 후 스스로 개발이익을 취하도록하는 방식이었다. 수익을 담보한 대규모 주택단지와 신시가지개발의 효과는 커서 강남 일대에 수십만채의 단지형 아파트가 건설되었다. 그러나 관청이 주도권을 쥐고 해야할 도시개발을 일정부분 민간에 기탁하게 됨으로써, '시민아파트'를 짓고 관청이 분양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민간건설회사가 주택을 판매(분양)하게 된 것이다. 부동산인 주택을 사고파는 것이 문제라 할 것은 없지만 분명 차이점이 있었는데, 대규모 단지형아파트가 하나의 상품이라는 점에서 향후의 삶(주거)은 사소해지며 물품(주택)으로 취급될 위험성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TV 등의 광고가 조장하는 '아파트의 브랜드화'는 심미화의 과정이며 실존보다 귀족 취향을 낳게 할 것이며, 이는 삶의 내용이 축소되어 형식적으로 흘러 '삶의 목적'보다 질문이 필요치 않은 '수단'으로 전락할 위험성을 내포했다. 최근 정부는 턱없이 오르는 집값 안정을 위해 다양한 정책을 쏟아 놓았다. 세밀한 부동산 세금 정책은 종부세, 양도세, 전월세상한제 등에 대한 직접적 효과를 기대한다. 그러나 이에 반발하는 측에서 풍선효과로 한시적일 수밖에 없다는 지적과 그리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세간의 반대가 공존한다. 손해를 두려워하는 욕망을 대변하는 것이며 현실적으로 집 마련의 꿈을 포기하는 미래 세대에게 계속 오르기만 하는 집 값을 바라보면 그 꿈조차 신기루 같은 것이다. 집은 최소한의 거주권에 기대어 적정한 비용을 치루고 거주할 수 있어야 한다. 거주권은 숭고한 권리이다.

    미래의 도시가 현재의 모습과 얼마나 다를지는 정확히 알 수없다. 가능한 시나리오는 공간 사용의 방식이 가져올 주거와 이동의 변화는 초공간의 방식과 체계로 옮겨갈 듯하며 이는 무선인식 기술에 기반한 인공지능의 바탕 위에서 구현될 것으로 보인다. 이미 과밀한 대도시는 사회, 경제적 원인은 물론이고 수평적 확산보다 하늘로 치솟는 높이 경쟁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미지와 상품의 과잉은 지금까지의 "시간과 공간이 축소되며 유연적 축적"이 삶의 전방위에 걸쳐 있다는 반증으로, “자본이 이윤을 내는 방식, 잉여가치를 추출하는 방식은 아주 다양하다”.(데이비드 하비) 내용보다 환상을 창출하는 광고이미지는 상품이 아닌 이미지를 소유하고 싶은 충동에 호소한다. 이는 한 공간에서 현실과 가상이 뒤섞인채 인식을 주도하는 세계이며, "방향감각을 앗아가고 정치적 불구로 만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공간 논리"(프레드릭 제임슨)의 편재이다. 하지만 온통 자본에 포섭된 정크스페이스도 "비순응적 태도를 보이는 촌부의 몸짓"에 흔들릴 수 밖에 없다. 이처럼 콜하스는 글쓰기로 건축에 공성 망치를 휘둘러, 후기자본주의와 그것에 내재된 사물화의 힘을 이길 역사로의 탈출을 권한다.(제임슨) “그럼에도 여전히, … 콜하스의 냉담한 사실주의적 묘사가 ‘에스’나 ‘노’를 구분할 비판적 경계마저 흐린채 중립적이고 분명한 비판을 취하지 않는 이상 현실은 오히려 정크스페이스를 반영하려는 환상이 될 뿐이다”(조순익)

    타국의 도시 인상이 호감으로 다가왔던 기억이 있다. 남방 기후대의 건물에 짙은 음영이 드리워 양감이 돋보였고 풍토와 지역의 양식이 눈길을 끌었다. 큰집 작은집, 가로의 빌딩과 상점들, 그리고 공회당과 맨션(아파트), 교회와 광장이 뒤섞인 도시는 좋은 도시의 조건이다. 우리의 인식이 경험으로부터 형성되고 특정한 도시 이미지로부터 그 도시를 인지한 것이라면, 이런 도시에서는 역사와 꿈이 행복하게 공존할 것이며 노인과 아이도 함께할 것이다. 시간이 담겨 낡은 건물은 고쳐 쓰거나 새 건물이 되고 또 신축을 위한 건설은 끊임없이 이어질 것임으로 더불어 살 만할 것이다. 이런 도시는 주거(택) 문제로 인한 사회적 분열보다 조건에 따른 관습이 있고 상식이 앞서는 사회이다. 마치 삶이 부동산에 저당 잡히기 전의 모습, 그 삶에 햇살이 깃드는 모습일 것이며, 주거의 조건을 물을 수 있는 곳에서 젊은 미래의 꿈은 자라날 수 있을 것이다.

    참조 :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 데이비드 하비. 한울>, <건축의 마취제. 닐 리치. ACA>, <퓨즈원더. 조택연. 간향미디어랩 GML>, <정크스페이스/미래도시. 렘 콜하스 프레드릭 제임슨. 문학과지성사>, <보는 기계와 읽는 인간. 조순익. 시공문화사>

    _no.73 《와이드AR》 2020년 09-10월호

  • 오월동주_7월의 바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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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eb 08, 2021

    김재경의 PHOTOSSAY 12

     

    유례는 있었다. 중세도시 피렌체에서 처음 발병한 흑사병이 유럽 전역에 창궐해 당시 인구의 1/3을 죽음으로 몰아간 일이나. 근세기 초 스페인 독감이 지구촌 전역으로 번져 각각 수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일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례가 우리의 감정에 직접 와닿지 않는 것은 모두 당대의 일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10여 년간 동시대인들이 바이러스의 무차별적 감염으로부터 받는 시달림은 사뭇 과거와 다른 양상으로 다가온다. 물류와 인적 이동의 측면에서 문명과 교통의 발달은 지구촌이 동시간대로 묶였고 신종 질병의 확산적 측면에서는 전혀 다른 국면을 보였다. 피해규모는 그렇다 치더라도 지구촌이 연동되어 단기간의 전파에 무력감을 보였다. 물리적 국경 외에 심리적 국경이 무색해진 현대사회에서 질병관리 체계 와 방역의 대처는 지도자의 능력을 가늠하는 시대가 되었으며, 따라서 모두는 다양함과 불안정함 그리고 예측불가능성의 시험대(포스트 코로나 시대)로 내몰리는 처지가 되었다. 

    회전력을 잃으면 넘어지는 팽이처럼 성장이 멈추는 순간 쇠락하는 운명을 지닌 대도시. 이곳에 수많은 사람들이 살며 전통과 문화유산으로 도시의 지속성을 얻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머물러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예측되는 수요에 대응해 발전적으로 도시 인프라를 개선하며 유지와 보수를 하고, 우리의 경우 신도시 건설과 주거개선이 필요한 지역은 대규모로 재개발과 재건축을 했다. 산업시대에 편중된 시민의 주거지 정비는 거주민 스스로 짓고 살기보다 입주하는 곳이 되었고 정서로 충만한 '홈'이기보다 물리적 환경의 '하우스'로 인식되기도 했다. 거주가 목적이기보다 재화구축의 측면이 강화된 것은 우리네 삶의 양태가 그대로 반영되었으므로 나무 나이테처럼 하나의 지표로 읽히게 된다. 어떻든 삶의 거소에 관련한 이야기는 관점에 따라서 견해가 갈리는데 낡은 집을 수선해 재사용하는 경향성은 트렌디한 문화로 자릴 잡았다. 이런 배경에 놓인 지난 시기, 난개발이 반복되던 도시주변은 늘 어수선 했으며 두서없이 보이는 건물에서 각각의 이해는 제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엄숙할 필요야 없지만 상징과 표현이 넘치는 끼는 발랄하다 못해 아예 산에 오르거나 도시에 정박한 배 모양, 유럽의 성채를 닮 은 모텔 등, 낯선 형태로 사람들의 이목을 붙잡으려 한다. 직주 거리가 늘며 차량으로 이동하는 사람들 눈에 거리 풍경이 들어오는데 상징적 모양이 망막에 즉각적일 수밖에 없듯이 글자는 클수록 좋다. 그리고 누구에게는 마뜩치 않은 인상을 주기도 했을 테지만 이런 현상은 각자의 비즈니스와 연계되므로 자연스런 욕망의 발현이며 그렇기에 유행처럼 번져나갔을 것이다. 일찍이 미국에서 유사한 사례를 관찰했던 벤츄리 부부의 ‘라스베이거스의 교훈’이 그동안 밀쳐진 건축의 상징성 회복에 대한 선언이듯 빛과 그늘은 동전의 양면처럼 늘 짝을 이룬다. 

    인류의 미적 감각이 훈련과 노력의 산물일지라도 태생적 감각은 그와 달라서 동물의 세계도 유사한 사례들이 적지 않다. 이처럼 우세 종을 퍼뜨리는 자연선택의 유전적 사례가 허다하지만, 원래부터 조형적이라 할 건축의 구축성이 아날로그를 대변하는 것이라면 그만큼 물질의 영역을 떠날 수 없다는 말도 될 것이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가 되며 그 이전에는 어려웠을 제 분야의 공통적인 이해와 한계는 쉽사리 벽을 깨고 눈앞에 실현되고, 미리 가상의 구현과정에서 최상의 결과를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미지의 세계는 남아서, 결과는 변수의 영향을 받는 것처럼 인간의 욕망은 각기 각색으로 분화된다. 일차적 욕구의 해소부터 예술의 승화까지 범주는 다르겠으나 인간 욕망의 기저를 이루는 동적 요인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연꽃은 진흙에서 피어나고 건축은 욕망을 딛고서 자라난다. 지난 시대 보편적 인간의 역사에 대한 기획이 동력을 잃자 전환점이 되어 탈 근 대의 문턱을 넘었으나 이 역시 각론의 차원에서 서로의 전유물이 되고 말았다. 그 가운데 소통을 매개하는 가볍고 힙한 이미지를 선호하는 시대는 디지털 시대의 대표적 현상으로 자리매김했다. 

    사진에 보이는 상징적 건물은 필름이 아닌 인화지로 찍었다. 일종의 캘러타이프Calotype로, 대형사진기에 필름 대신 양화Slide film용 프린트 인화지를 장착해 찍은 사진(상징적 건물)이며 좌우가 뒤바뀌었다. 그 위에 디지털 사진(디자인 건축)을 한 화면에 배치해 콜라주 함으로써 질문의 형식을 빌었다. 이로써 대조된 건물과 건축이 한 장면을 이뤄 우연을 가장하지만 오히려 바라기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병치시켜 또 다른 혼돈을 가장해 의식의 빈 공간을 초대했다. 이는 건축의 역사에서 건축장식에 대한 피로감이 국제주의 양식을 낳았고 따라서 세계를 보편 속에 가두려 했으나 미완에 그친 것처럼 시시포스적 건축 욕망에 대한 사진 작업이다. 흐르는 시간 속에서, 그리고 지금 여기 ‘COVID-19’가 판치는 시대를 지나며 어쩌면 우리는 유동적 사태와 상황을 보면서도 여전히 고정된 것으로 인식하려는 오류에, 사회적 피로감 아래 질문보다는 답에 안주하는 삶을 바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오월동주', 어려움 앞에 원수도 협력하는 상황을 떠올려 시대를 건너는 힘이길 바라는 것은 우리 모두 실존의 부조리에 정면으로 맞서야 하는 숙명을 지녔기 때문이다. 

    * 캘러타이프(Calotype, Talbotype)는 윌리엄 폭스 탤벗이 1841년 발명해 특허를 받은 촬영술이다. 종이에 감광제를 발라 찍으며, 유리습판이 나오기 직전의 방식 이었다. 

    _no.72 《와이드AR》 2020년 07-08월호

  • 단관극장의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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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eb 08, 2021

    김재경의 PHOTOSSAY 11

     

    눈이 소복이 쌓이면 아이들은 신이 난다. 놀이에 빠져 덩달아 뛰며 개와 아이들은 신이 난다. 옷이 젖도록 그랬던 어느 날, 나는 눈뭉치를 장독대에 쌓은채 한 밤을 기다렸다. 이윽고 큰길 가게 앞에 사람들이 북적이고 신호가 떨어지자 미리 준비한 눈뭉치를 연거푸 지붕 너머로 날렸다. 극장이 파하고 집으로 가던 사람들을 놀리려는 장난 이었지만 방금 본 영화의 잔상에 젖어 돌아가던 바깥 행인들은 아닌밤의 홍두깨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또 풍작풍작 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모이는 곳, 누군가의 등짐에서 큰북이 쿵쿵대는데 발뒤쿰치로 이어진 줄이 북채를 흔들어 소리를 냈다. 그 뿐일까 두 손에 들린 심벌즈는 챙 챙~ 소리를 내고 아이들은 재잘재잘, 뒤를 따른다. 깃발을 들고, 음악을 연주하며 출연자들이 중심에 서서 공연을 알리는데 유랑 서커스가 들어와도 비슷했다. 입장객을 정리하는 통로가 그 역할을 못 하면 질서유지를 위해 극장 매표원(기도주임)의 막대기가 애들 머리를 톡톡 건드렸다. 단체관람 때엔 왁자지껄 자릴 잡고 앉은 후 곧이어 영화에 빠져들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때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할 수는 없다. 어둡고 서늘한 공 간, 주물로 문양을 새긴 좌석, 헤어진 내자 커버, 그리고 번들거리는 비로드 천은 일상과 다른 분위기를 연출하기에 충분했다. 이제는 개그나 신파극에서 볼 수 있을 듯한 지방 소읍의 옛 풍경이다. 

    동양적 외모에 강렬한 눈빛의 배우 율 브리너, ‘왕과 나’를 국민(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보았지만 자세한 내용은 기억에 없다. 금성극장(남영동)의 ‘황야의 무법자’, 휘파람 멋진 소리로 시작하는 그 영화는 대도시로 진학한 가형이 보여 줬다. 금을 숨긴 관이 늪에 빠지고 … 지금도 잊히지 않는 장면이다. 그런데 미심쩍은 점을 찾아보니 크린트 이스트 우드가 아닌 다른 배우(프랑코 네로)가 연기했던 ‘장고’(속. 황야의 무법자)다. 이처럼 기억이란 편집되어 뒤섞이고 보면 난감하기 이를데 없는데 “추억이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상상력이 추억 즉 과거의 이미지를 그것이 지향하는 바, 원형으로 변화시켜 나가기 때문이다.”(가스통 바슐라르) 

    극장을 영화관이라 부르지 않았던 것은 시대를 반영한다. 조선과 대한제국 시기에 걸쳐서 정치국丁致國이 인천 경동에 민간극장 협률사協律舍(1895. 현재 애관극장)를 개관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강화도조약(1876) 후 제물포에 조계(거류지)가 설치(1883)되자 중국, 일본 등 외국인의 거주와 영업이 번창했다. 따라서 권번 기생들의 춤과 명창 판소리, 곡예 등 전통연희를 여는 복합공연장이 문을 연 것은 발빠른 문화 사업에 다름 아니었다. 그리고 근대건축의 기수 심의석(沈宜錫)이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행사를 위해 고대 로마식 원형극장을 본떠 협률사協律社(1902)를 지었다. 하지만 재정적 어려움으로 대중적 취향의 춤, 노래 외에 영화도 상영하는 사설극장 원각사圓覺社로 바뀌고 후 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첫 영화관이라 불리는 단성사(1907)가 종로에 들어섰다. 특히 지방 소도시 극장들은 공간 대관사업의 비중이 높았는데 극장주가 공간을, 영화배급사는 콘텐츠를 가지고 이익을 나누는 영화업 외에 빈 시간대를 채워 수익을 높이려 했다. 이처럼 극장들은 문화적 적응력과 더불어 발전했으며 공연과 집회, 영화상영 등 많은 사람들이 실내로 모이는 행사에 “극장은 지역공동체의 의제가 제시되고 토론되고 결정되는 정치적인 공간이었다.”(이호걸) 이러한 단관극장의 수는 60년 대에 제일 많았고 70년 대부터 점차 숫자가 줄어들기 시작한다. 텔레비전(TV)의 보급이 가져온 현상이며, 각 가정에 TV가 늘어나자 문화소비 욕구가 다변화되며 상대적으로 극장사업은 점차 쇠락의 길에 접어들었다. 관객수가 줄며 시설의 유지 보수가 악순환에 빠지자 하나 둘 폐업 또는 회생의 몸짓을 보였다. 적은 비용을 들여서 얼굴(파사드)을 고치기 시작했으며 극장 전면을 덧대는 방식으로 분위기를 바꾸었다. 그리고 다른 극장들은 여기서 더 나아 가 내부를 고치기 시작했다. 작은 공간으로 쪼개 1관 ~ 3관 소극장 형태로 변신했지만 그조차 세월의 흐름을 따르기 역부족일 수밖에 없었다. 급기야 복합문화공간 서울시네마타운(1989)과, 강변 테크노마트에 멀티플렉스 영화관 CGV(1998)가 문을 열자 한 공간에서 영화를 골라보며 다양한 문화를 즐기는 점에서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반면에 빛과 그늘이 짝을 이루듯이 문화적 감수성이 자본의 주도로 이루어지는 점에서는 생각거리를 준다. 비록 지난 시절 통제와 검열, 문화를 앞세운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의 진열장으로써 생존을 위해 스스로 변화하지 않을 수 없었던 단관극장은 비록 스크린이 하나지만 오히려 멀티플렉스보다 더 다양한 영화를 상영했다. 지금처럼 흥행에 따라서 스크린 이 점령되는 시스템이 아닌, 1~3류 극장으로 내려가며 동시상영이나 성인물 등 정서를 자극하는 전략적 선택은 역설적 특이점으로 다가온다. 이런 바탕에서 꽃을 피운 것일까, 최근 영화 <기생충>의 쾌거는 연쇄극* <의리적 구토>(1919)의 영화적 실천으로 시작한 한국영화에 자긍심으로 충분하며 우리 모두는 지금까지 남을 의식하던 처지에서 그 역할 이 뒤바뀌는 시절을 살아가고 있다. 


    * 사진적 기록성과 활동사진적 감각, 그리고 서사로 구축되는 허구적 세계가 공존하는 양식. <의리적 구토>는 단성사 극장주 박승필과 신파신극좌 대표 김도산이 만들어 상영(1919)했다.

    참조: [위키피디아] [식민지 조선의 문화사업, 극장업. 이호걸] [김승국의 국악담론] [과거와의 조우: 단관극장, 근대적 공 간 그 너머. 성혜인. 문화과학] [김추자, 선데이서울 게다가 긴급조치. 이성욱. 생각의 나무] [한국영화 100년, 그 기원에 대하여. 정종화] 

    _no.71 《와이드AR》 2020년 05-0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