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극장, 어둠 속에 실루엣 _2003년 전국 단관극장의 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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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g 04, 2025

    김재경의 PHOTSSAY 37_ no.97 《와이드AR》 2025년 07-08

     

    한 무리 사람들이 지나가던 모습이 옛 기억으로 남았다.

    겨울 밤, 마지막 영화가 끝나자 지방 소읍의 길거리는 순간 깨어나고.

    웅성거리는 군중의 실루엣이 어둠 속에 나타났다.

     

    “1998년 제일제당그룹이 ‘강변 CGV’(11개관)를 개관해 한국에 본격적인 멀티플렉스 시대를 열었다. 

    2000년 CJ엔터테인먼트와 동양그룹이 메가박스(17개관)로 가세. 

    그리고 롯데그룹이 스크린 수를 경쟁적으로 늘리자 영화관람 환경 전체가 개선되고 있었다.”

     

    “그때까지 연도별 극장수의 변화. 

    1984년 대극장(350개) 소극장(184개) 비율이 1998년 대극장(236개) 소극장(271개)로 반등되고 있었다. 

    2000년 전국에 걸쳐 멀티플렉스(3개관 이상) 상영관이 317개로 늘어난다.”

     

    “멀티플렉스 전성시대. 극장문화가 바뀌고 있다. 극장은 이제 단순한 영화 관람 장소에 그치지 않고, 한 공간에서 영화, 쇼핑, 외식, 게임 등 여러 가지를 동시에 즐기는 시대가 됐다. 그 문화를 멀티플렉스 극장이 이끌고 있다.”(일간스포츠, 2000.12.20 이동현)

     

    “2000년 한국영화계 20대 사건. 

    멀티플렉스는 더이상 낯선 풍경이 아니다. 메가박스, MMC, 센트럴6, 정동 스타식스 등 올해 새로 안착한 멀티플렉스가 보유한 스크린 수만 헤아려도 40개. 하지만 아직 극장 포화상태를 걱정할 때는 아닌 것 같다. 5월 13일 개관한 메가박스의 사례는 멀티플렉스가 ‘잠재’ 관객을 극장으로 ‘호출’한다는 사실을 통계로 확인시켜 줬기 때문. 16관을 거느린 이 ‘공룡’ 극장을 개관한 지 석 달 만에 관객수 100만 명을 돌파하는 기염을 토했다. 상황이 위험수위를 넘자 종로 3가를 중심으로 한 기존 극장들이 대형 쇼핑몰을 기반으로 한 멀티플렉스의 등장에 압박을 느끼는 것도 당연하다. 터줏대감인 서울극장이 25억원을 들여 극장 내부를 새로 했고 단성사, 피카디리 등도 8개관 이상의 복합관 시공 계획을 서두르고 있다.”

     

    한국영화연감에 나온 전화 번호를 돌려 극장 건물의 상태를 확인했다.

    우선 건물 파사드를 고쳤는지, 로비 홀과 상영관 내부는 어떤지 상태를 물었다.

    2003년 그때, 시대의 변화에 느린 단관극장이 전국에 얼마 남지않은 듯했다.

     

    참고 및 인용 : [ 2001년도판 한국영화연감, 연화진흥위원회 엮음 ]

     

  • 연탄, 그 연탄가게의 초상(肖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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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g 04, 2025

    김재경의 PHOTSSAY 36_ no.96 《와이드AR》 2025년 05-06

     

    얼음이 살짝 언 동치미 국물은 겨울에 먹어야 제격이다. 

    이 맛을 아마 지금의 세대가 알 수 있으려나..

    그건 19공탄이라 부른 연탄과 얽힌 사연 때문이다. 

     

    데운 물에서 하얀 김이 피어나고, 시린 손으로 얼굴을 닦던 새벽.

    연탄은 서민 삶에 꼭 있어야만 하는 것으로 

    겨울채비, 추워지기 전에 반드시 들여놓는 것이었다. 

     

    비록 그 생김새가 시커멓고 잘 생기지 않아도 우리네 삶 같아서,

    벌겋게 달아오른 불꽃은 인생의 순간과, 팍팍한 가슴을 녹이는 따스함이 있지.

    안줏거리 오징어, 밥상에 오를 김도 이 연탄불에 굽곤 했다. 

     

    구들방 데우는 두 장 연탄을 갈아주는 일은 성가셨다.

    한 밤에 일어나 연탄을 갈고, 

    또 그 때를 놓쳐 불을 꺼뜨리던 일 조차 모두 그렇게 지나갔다. 

     

    집집마다 밖에 내놓은 연탄재는 천덕꾸러기. 

    비에 젖어 칙칙하고 허물어져도 간혹 연탄재가 빛을 발휘 했으니 그건 눈 오는 날. 

    흡수력이 좋아 턱하고 던진 것을 밟아 깨뜨리면 모래보다 제동력이 앞섰다. 

     

    리어카에 연탄을 싣고 오가며 대주던 아저씨는 늘 까무잡잡.

    검댕 칠을 한 옷과 얼굴을 보면 안쓰러운 모습.

    삶과 노동의 경건함이, 연탄을 보면 매케한 냄새가 나는 듯하다.

     

    잠 깬 머리가 무겁고 가슴이 벌렁거리면 연탄 가스를 마신게야.

    그래서 학교도 못가고 또 애먼 사람이 황천길로 떠나기도 했다.

    119 안전센터가 없던 시절 그땐 그저 민간요법이 전부.

     

    부엌과 장독대로 달려간 우리네 어머니들, 동치미 국물을 떠다 먹였다.

    한 때 취사와 난방을 위해 주거와 짝해 삶의 애환과 애증을 동시에 느끼게하는

    연탄, 그 연탄가게의 초상(肖像).

  • 영등포, 공업도시의 형성과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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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y 19, 2025

    김재경의 PHOTSSAY 35_ no.95 《와이드AR》 2025년 01-02

     

    나의 기억 속에 붉은 네온빛 왕관이 하나 있다. 둥실 하늘에 떠있던 그 왕관이 보이자 승객들은 짐을 챙기기 시작했고, 어머니 치맛자락의 소년 눈에 비친, 4시간 반 거리 완행열차의 오래된 기억 속에 60년대 모습이 새겨졌다. 군복무 시절 부평 백마장을 가려면 영등포역 앞에서 버스를 탔다. 골목 안쪽의 홍등가와 노상방뇨 금지 가위그림은 묘한 대비를 이루던 곳이었다. 그리고 제대 후 여의도를 거쳐 영등포에서 일을 했지만 이번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생활전선에 놓이면 다르니 그럴까. 밤마다 붉은 네온으로 빛나던 그 왕관은 영등포 크라운맥주공장 건물 옥상에 설치된 것이었다. 조각난 기억의 흔적을 따라가 보니 수십번도 더 바뀌었을 영등포의 형성과 변화는 백 년 시간속에 압축돼 있었다.

    “영등포 지명의 유래는 조선 정조 13년(1789)에 발간된 ‘호구총수’에 나온다.(경기도 금천현 하북면 영등포리) 이후 19세기 열강에 대한 저항 수단으로써 영등포는 서울 수호의 주변부로 부상했다.(고종 13년1876 ‘고종실록’ 에 영등포 언급) 조선시대까지 경상도나 전라도 가는 길에서 벗어나 있었지만 인천 제물포에 개항장이 개설(1883)되자 사정이 달라졌다. 근대기 이전까지 농사나 짓던 마을 영등포가 교통의 요지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경인,경부선(1900년 전후)의 분기점으로 역전에 신시가지가 형성됐다. 조선총독부는 경기도청을 수원에서 경성부로 옮긴데 이어서 시흥군청(구로세무서 자리)을 하북면 영등포리로 옮겼다. 일본인이 많아 군청소재지(1910)에서 지정면(1917. 일본인의 편의를 위한 제도)으로 지정돼 행정 편의가 뒤따랐다. 그즈음의 ‘주요시가지현재호구조사’(1910~16)에서, 영등포리 일본인 비율 40.14~41.5%는 대전(58.3%), 군산((46.7%)에 이어 세번째로 높은 편이었다. 이후 조선공업화정책(1930년대) 아래 시행된 공업도시화의 길에서 경성부는 영등포를 서울에 편입(1936)했고, 해방과 한국전쟁 후 남한 최고의 공업지역으로 주변에 주거지와 상업기능도 발달하게 되었다. 한일합방 후 ‘조선피혁주식회사’(1911)가 당산리에 설립된 것은 영등포가 서울의 공업지역이 되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조선에 풍부한 우피를 활용해 청일.러일전쟁 군수용 피혁제품 수요를 맞추려는 총독부 의도가 있었고, 테라우치 총독은 영등포역에서 분기시킨 철도인입선을 시설하는 조치도 해주었다. 일본이 명치유신 전까지 육고기 섭취를 금해 소가죽이 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철도차량(객차, 화차, 기관차 등)을 만들던 용산 철도공장의 ‘용산공작소 영등포공장’이 철도인입선 중간에 자리 잡았다. 경성방직주식회사(1923)가 지금의 타임스퀘어 자리에 들어왔다. 영등포역 뒷편 철도관사 자리의 서측 땅에는 ‘조선요업주식회사’(1919)(대일본(조선)맥주 1933-크라운맥주 1951-영등포푸르지오아파트 2002)가 창립되고, 영등포공원 자리에는 ‘경성요업주식회사’(1920)(나가시마 와공장 - 토관공장 - 경성요업 - 쇼와기린맥주1933 - 동양(OB)맥주 1945)가 자릴 잡았다. 이는 한강, 안양천, 도림천으로 둘러싸여 용수 공급이 원활한 잇점이 작용한 결과이다. 일본 재벌의 ‘종연방적주식회사’(1935)가 지금의 2호선 문래역 우측 너른땅에, 그 서쪽땅에 ‘동양방적주식회사’(1937), 이어서 당산동 ‘조선피혁’ 바로 아래에 ‘대일본방적회사’(1939)가 들어오자 일본 3대 방적회사가 모두 들어온 셈이었다. ‘창화염색공장’(1934)이 종연방적 부지 북측에, ‘일청제분주식회사’(1937. 조선제분 1952 - 대선제분 1958)는 종연방적 동쪽 땅에 자리했다. 1943년 당시 영등포지역 공장목록(경성상공회의소)에 방직공장, 금속, 기계기구, 요업 및 동제품, 화학, 제재 및 목제품, 활판인쇄, 음식료품 등 87개 공장이 집계되었다. 대략 영등포역전의 기존 상업지역에 더해 조선피혁주식회사(당산삼성래미안, 효성, 센트럴파크아파트), 용산공작소(영등포경찰서 일대), 종연방직, 경성방직(문래역 동측), 동양방직(문래역 서측) 등이 자리한 곳은 공업지역으로, 영등포리마을(아크로타워스퀘어아파트), 당산리마을(당산역 동측), 양평리마을(선유도역 동측), 사촌마을(문래동사거리 주변), 영등포리 신촌(영등포 청과시장) 등 기존 마을은 주거지역으로, 그 외의 지역은 비어 있었고, 철도인입선 추가 부설은 실현되지 않아 계획선만 남았다. 조선공업화정책 아래 일본 본토의 대규모 공장 진출은 토지구획정리사업(1937) 이전에 집중됐다. 조선주택영단(1941)이 500채를 건설해 주로 방적회사의 임노동자의 주택수요를 감당했다. 중일전쟁으로 인천에 조선기계제작소(1937. 대우중공업 - 두산인프라코어)와 대규모 공장들이 세워진 반면 영등포는 그 이전부터 경공업지역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해방 후 북에서 내려온 피난민과 일본, 만주 등지에서의 귀환동포의 정착지로 부상했다. 전후 영등포는 용산과 부평처럼 미군촌을 형성했다. 여의도비행장(미군 숙사), 양평동(미군 창고), 당산동(당산동 미군부대), 문래공원(제6군단 포병사령부), 미군소방(제657)부대 등이 있었다. 한국전쟁은 영등포지역 건물 대부분을 파괴했고 서울 수복 후 재건되었다. 종연방직은 고려방직으로 바뀌어 백낙승(비디오예술가 백남준 부친)에게 불하돼 방림방직(태창방직)이 되고, 동양방적은 육군 제6관구사령부(수도방위사령부, 박정희 장군 5.16혁명 지휘)가 사용했다. 이어서 국가주도 경제개발(1960년대)이 시작되며 도시형 제조업 공장들이 들어서고 안양천변 일부를 제외한 전지역에 건물이 들어섰다(70년대). 한편 신길동 일대는 택지화 계획 아래 영등포초교, 영등포여중, 서울공업고, 성남중학교 등이 자리 잡았다. 공업지역과 주거지역의 확장을 따라서 상업 및 유흥지역이 확대되자 영등포 지역은 강남 일대의 핵으로 기능하게 되었다.” 종종 수도권 철도지하화 계획이 거론되면 나뉜 지역이 연결돼 지역경제에 보탬이 되는 상상도 해본다. 서울 서남부에 위치한 영등포의 과거, 그 형성 배경과 변화를 따라가 보았다.

    참고 및 인용 : <근대 서울 공업지역 영등포의 도시 성격 변화와 공간 구성 특징, 서울대학교 대학원, 김하나>, 영등포구청 도시정보, [노컷뉴스], [인천일보], [미디어버스], [위키피디아]

  • 대구읍성의 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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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an 10, 2025

    김재경의 PHOTSSAY 34_ no.94 《와이드AR》 2024년 11-12

     

    바다 건너 일본이 전국시대를 지나며 오다 노부나가 사후 실권을 잡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스스로 관백* 자리에 올랐다. 출신이 낮아 쇼군(정이대장군)이 되지 못하는 한계에 부딪혀 그 힘이 응축되고 있었던게 아닐까. 이런 움직임에 충분하지는 않았지만 선조 23년(1590) 대구읍성이 축조되었다. 윤방(대구부사)이 수축한 토성은 임진왜란 때 왜군(고니시 유키나가)이 파괴했다. 이후 경주, 상주 등지로 옮겨 다니며 경상도를 관할하던 경상감영이 대구에 들어서고, 영조 12년(1736)에 토성이 있던 자리에 석성을 쌓았다. 원래의 토성이 파괴된 지 140여 년만의 일이다. 이런 대구 읍성이 다시 해를 입었다. 일제시대 일본 거류민들이 ‘야마모토 군수’라 부르며 칭송을 아끼지 않던 친일파 박중양(대구군수 겸 관찰사 서리) 등에 의해 불법 철거되었다.

    북성로는 대구읍성의 공북문과 북쪽 성곽이 지나던 구간으로 일대에 기계공구상가가 밀집한 곳이다. 대구읍성 성곽 중 가장 먼저 해체되고 난 길이다. 부산, 인천이 도심지 외곽 바닷가에 조계지를 형성한 것에 반해 대구는 일본인 거주지가 기존의 조선인 중심지역을 점거하며 도시공간을 확대해 나갔다. 러일전쟁을 위해 일본이 부설한 경부선에 이권이 개입됐다. 그들은 대구 정차장이 일본인 거주지 쪽을 지나도록 박중양에게 손을 썼고. 경부선이 개통되자 부지개발을 위해 대구읍성의 성곽 해체를 요구했다. 성곽을 해체한 일본인들은 성내의 도심부에 자리 잡은 후 상권을 점거해 막대한 돈을 벌었다. 후일 대구역은 도심의 상징적 장소성을 백화점에 내주면서 역사의 기억을 모두 잃게 되었다.

    대구는 근세기 들어서 간직한 문화유산이 적지 않다. 계산동 일대의 문화재와 역사적 인물, 한국전쟁과 문인들의 피난시절에 얽힌 향촌동의 이야기 등. 낡은 것을 버리려 하기보다 잘 고치고 덧대어 시간성을 유지하는 도시는 바람직하다. 한 도시가 시간의 경과를 간직한 물적 자산을 유지해 발전한 경우는 진정 살아있는 도시라 해도 지나침이 없다. 읍성을 중심으로 확장되어 오늘에 이른 대구는 서울 못지않게 번화하다. 동성로 일대 밤거리는 여느 대도시에 뒤쳐지지 않는 화려함을 보여 준다. 패션, 주얼리, 핸드폰 등의 가게들은 활기차다.

    대구에서 세계육상선수권대회가 열리던 해 조직위 산하 단체에서 의뢰를 받았다. 사진 도시기록에 구체적인 과업지시 세부사항이 없이 재량권이 주어졌다. 성곽 이름이 붙은 도시의 길은 그냥 생기지 않는다. 북성로, 동성로 등 대구 중심부 길은 성곽이 있던 자리를 말해준다. 오래전의 일이지만 2011년 현재의 모습 일부를 사진에 담았다.

    * 일본 최초로 무가 출신 관백이다. 조정대신 중 최고위직으로 정무를 총괄하는 직책이다.

    참조: [위키백과] <한국 도시디자인 탐사, 김민수, 그린비>

  • 사람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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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an 10, 2025

    김재경의 PHOTSSAY 33_ no.93 《와이드AR》 2024년 09-10

    *찬조 글. 마웃당 전발

     

     

    두갈래

    세갈래

    언덕길

    사람의 길

    바라만 봐도

    숨이 차오르는

    염병할 계단

    숱한 시간을 오르내리던

    한때는 화사했을

    할머니

    내일은 또 내일의 태양이 떠오른다고 했지

    영화의 여주인공처럼

    쉬어가시오

    쉴 수 있다는 건

    살아있는 자들만이 누리는 권리

    여기 그늘이 있어요

    독거노인 맞습니다

    그렇게들 부르더이다

    잠시 앉았다가 가시오

    이렇게 만나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어느새 굽은 허리

    다시 꼿꼿해질 순 없어도

    함께 있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지 몰라

  • 너도 나도 그 덕에 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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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g 28, 2024

    김재경의 PHOTSSAY 32_ no.92 《와이드AR》 2024년 07-08

     

     

    골목길, 입체로 발달한 도시의 핏줄.

    에게해 산토리니 하얀 집은 아름답다. 

    그러나 서울 산동네가 우리 삶의 실존. 

     

    다른 시각으로 봐, 지속 가능성.

    질긴 삶의 유대가 거기에 있었고,

    사회적 현상은 사건에 나타나지.

     

    편리와 불편은 동전의 양면. 

    시민의 덕목은, 규칙 만드는 사람과 따르는 사람 모두.

    그런데 강박증으로 시달려, 왜 그런가. 

     

    집단화의 그늘, 거기엔 개인 소외도 있고.

    지금 우리의 삶이 더 낫다할 수 있나. 

    서로 신뢰하지 못하는 정글 사회.

     

    여지껏 삶의 거소를 지웠다. 

    집의 가치, 사고파는 상품이 되고.

    축소된 삶이 헛물만 들이키네.

     

    이것과 저것 사이, (과)도 있지.

    언제나 새것이란, 모래성 같아.

    너 살던 곳 어디, 나 살던 곳도 모르겠어.

     

    서로 다른 건물이, 짓고 허물어지고.

    소소하고 번거로운 일들이, 사람 손이 필요하고.

    너도 나도 그 덕에 살고.

  • mute 2: 봉인된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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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g 28, 2024

    김재경의 PHOTSSAY 31_ no.91 《와이드AR》 2024년 05-06

     

     

     

     

    서울은 산과 함께 있는 도시다.

    조선 개국부터 성곽 중심으로 번성해, 수도로서 기능을 지금까지 수행하지.

    나라의 번성과 변혁의 용광로, 열강의 각축과 정쟁의 중심에서, 또 근대기 진입의 터전.

    도시에 큰 강을 품어 생명의 젖줄을 대고, 그 자락에 수많은 생명들을 기른다.

    성곽 4대문 안 ‘한양’, 그 밖의 십리까지 한성부는.

    임진왜란, 병자호란 때 인구가 줄었으나, 개국 초 십여만 명에서 구한말 수십만 명으로 늘었지.

    부산 원산 인천 개항, 해방과 전후, 산업시대를 지나며.

    유입 인구는 도시 확장을 촉진해, 틈새 공간마다 시민의 거소를 제공했다.

    도심 배후는 중심 상업지구를 지원하고, 대도시는 또 다시 주변으로 확장하지.

    출퇴근 시간이 짧고, 일터에 가까울수록 주거비는 높고.

    적절한 대안의, 낡은 주거지는 상대적 비용이 낮아.

    쇠락한 곳에서 나타나는 삶의 정황은, 인간 주거의 원초적 갈망.

    그 섬광이, 우릴 또 다른 곳으로 인도한다.

    어느 의자에 마음 줄까 하다가도 동네 할머니들의 얼굴얼굴이 떠올라 이내 그만뒀다.

    날이 따뜻하면 의자 대신 멍석이나 장판을 깔고 간식을 나누는 정겨운 이웃.

  • 푸른 바다의 환상 vs. 오래된 미래 _한남동과 보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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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g 28, 2024

    김재경의 PHOTSSAY 30​ _no.90 《와이드AR》 2024년 01-02

     

    “10월 30일 서울 용산구는 한남동과 보광동에 위치한 한남3재정비촉진구역의 정비사업 시행을 위해 이날부터 주민 이주를 개시한다고 밝혔다. 한남뉴타운지구가 지정(2003.11)된 이후 20년 만에 총 사업비 7조 원 규모의 서울 재개발 사업을 시작했다. 한남3구역 재개발사업은 한남동 686번지 일대에 지하 6층~지상 22층, 197개 동, 총 5816가구 규모의 아파트를 짓는 사업이다. 2009년 10월 서울시 재정비촉진계획 결정으로 구역이 지정됐다. 조합이 설립(2012.9)되고 사업시행계획이 인가(2019.3)됐다. 최종 시공자로 현대건설이 선정(2020.6)되고 지난해 조합 임시총회에서 관리처분계획을 수립, 8월 인가신청서를 제출했다. 용산구는 6월 한남3구역 관리처분계획을 인가했다. 한남3구역 이주 대상 8300여 가구 중에 세입자는 6500여 가구이다. 이주기간은 내년 5월 15일까지. 구는 상가세입자 손실보상 절차를 거쳐 이주 완료까지 2년 정도 소요될 것으로 내다봤다.”(서울경제 23.10.30)

    “한동안 추진 동력을 잃었던 뉴타운 사업(재정비촉진사업)이 서울시가 사업방식을 변경 함에 따라 다시 주목받고 있다. 올해 이문·휘경 뉴타운, 신림 뉴타운 등에서 공급된 물량은 흥행 열기를 보여 시장에서 입지적 가치를 인정받은 셈이다. 뉴타운의 정식 명칭 '도시재정비 촉진을 위한 특별법'에 따른 재정비촉진사업은 기존 소규모 개발을 탈피해 사업지를 묶어 대규모 단위로 정비하는 사업 방식이다. 2002년 이명박 전 대통령이 서울시장 재임 당시 낡은 구도심을 개발하기 위해 추진됐다. 4년 만에 26개 지구에 총 247개 구역으로 불어났다. 주거환경이 열악하고 낡은 단독주택 밀집 지역이 주요 대상으로 지정됐다. 2011년 10월 (고)박원순 시장은 취임 직후 '뉴타운 사업’ 대신 '보존형 주거지 재생'으로 노선을 틀었다. 개발보다는 보존에 초점을 맞춘 정책이었다. 오세훈 시장이 취임하며 상황이 달라졌다. 기존 한강변 35층, 고도제한 규제 등을 단계적으로 해제하고 있다. 보존 중심의 규제를 강화한 지 10년 만에 뉴타운 사업이 다시 추진되고 있다.”(뉴스핌 23.9.29)

    떠나는 이를 환송한 곳. 제천정(한남동 541)은 도성 남쪽 한강변에 면해 왕실이 소유하던 정자라, 임금이 행차해 전별회도 열었다. 태종과 세종이 대마도 정벌군의 삼군 도총수 일행에게 환송연을 베풀고, 중국 사신을 접대해 풍류를 즐기던 장소이다. 가까운 한강나루(한강진)에서 맞은편 사평(沙平)나루까지 배로 건너가 말죽거리·판교참(板橋站)을 거쳐 수원·용인 등 3남 지방으로 가던 길목이다. 이는 한남대교와 경부고속도로가 연결되는 것으로 설명이 된다. 볕이 좋은 강변 동네라 마을 수호신을 모시는 부군당이 전해 온다. 동빙고동 윗당(동빙고동 17)이 소실되자 아랫당(동빙고동 62)에 단군성조와 성비를, 보광동 부군당(보광동 155)은 흥무대왕 김유신을 모신다. 보광동 무후묘(보광동 419)는 제갈공명 그림이 봉안돼 있다. 특히 이곳은 용산기지 일대에 있던 둔지미 마을제당을 옮겨와 둔지미 부군당이라 불린다. 큰한강 부군당(한남동 385-1)과 작은한강 부군당(한남동 568-88)은 민간무속의 명맥이 끊긴채 비어있다. 태종이 기우제를 지내던 우사단(雩祀壇)이 있었고, 보광국사가 세운 절에서 조선 후기까지 봄·가을 기우제와 국운을 비는 제사를 지냈다. 평북 정주에서 내려와 자리 잡은 오산중·고와 서울정수(正修)기능대학 등이 있다. 한국 외교의 중심지(41개국 대사관)이지만 그밖의 지역은 다세대 주택과 빌라로 형성돼 낡은 집들이 많다. 외국인들이 많이 거주하며, 이슬람 서울중앙성원(1976~ )이 있는 우사단로 주변에 밀집된 주거지는 산지 형태의 특성을 띤다. 남서쪽이 완만한 경사지인 반면에 모스크 앞 일부 동남쪽은 급경사를 이뤄 골목이 입체로 발달했다. 이런 요소는 제3세계 문화권 사람들에게 친숙하게 다가왔다. 그도 아니면 적당히 낡고 저렴한 거주비용이 매력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뽕나무 밭이 푸른 바다가 되는(桑田碧海) 옛적의 변화(중국 진나라)가 지금 시대에는 새삼스러울 것조차 없다. 그러나 향후 이십 년 안에 서울 주거지 정비사업이 모두 완료되면 기왕의 낡은 주거지가 푸른 바다로 변하기만 할까. 현재 진행되고 있는 대규모 재건축 현장(이문·휘경 뉴타운 등)을 보면 향후 펼쳐질 삶의 편의성보다 기왕의 주거지에서 소거된 삶의 서사가 보인다. 한국 주거사의 관점에서 생활 세계에 미칠 사회적 현상 가운데 시대와 더불어 형성되는 주거 방식이 가져온 영향이 적지않다는 생각이다. 고유한 집에서 살다가 똑같은 집에 사는 삶의 문제에 부동산 가치가 끼어들면 그 차이는 극복이 어려운 난제가 된다. 그중 하나일 미래 세대의 결혼 기피현상이 인구 감소로 이어지고 수요가 하락하는 시점에서 언제까지 정부가 나서 부동산 가격을 유지하는 정책을 펴야 할까. 오르기만 하는 집 값이란 환상이며 딜레마일 뿐이다. 우리는 향후 이천년대 초 삼사십년에 걸쳐 개별 주거의 방식을 포기한 세대로 기록될지 모른다. 이는 획일한 삶의 양태로 가는 길이며 다양함을 포기하는 일에 다름아니다. 지금이라도 느린 삶의 방식이 우리의 도시 삶에 필요할지 모를 일이다. 미래 세대가 소박한 가정을 꾸리고 싶도록 해야 한다. 주거지가 쇠락하는 것은 시간의 문제만이 아니다. 유지 보수를 통해서 어느 정도 지속될 수 있다. 대규모 건설 건축 만능의 사고에서 벗어나 사회 시스템을 강화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거기에 지속가능성이 숨쉬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한남대교에서 바라 보이던 왼켠의 강북 한남동 풍경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몇 년 후 뾰족교회(한광교회) 주변 모두가 푸른 바다(아파트 숲)로 바뀔테니 말이다.

    참조 및 인용: 서울경제, 뉴스핌, 용산구 자료, 한국문화사(우리역사넷)

  • 난곡(낙골), 신림7동 20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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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an 02, 2024

    김재경의 PHOTSSAY 29 _no.89 《와이드AR》 2023년 11-12

     

    그때 어둡고 흙 냄새나던 곳을 왜 그리 좋아 했는지… 대개 동네마다 어린이 놀이터엔 후미진 곳이 있었다. 전 후, 모두의 삶이 점차 자릴 잡아도 도시와 마을은 여전히 낡은 곳이 있었다. 그래서일까 어린 눈에, 구석진 곳은 몽상의 나래를 피우기 좋았다. “다락이 없는 집에서는 신성함이 결여 되고, 지하실이 없는 집은 거주의 원형에서 제외된 집이다”(가스통 바슐라르). 물론 그 요건이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다해서 기억할 것이 없는 건 아니다. 이제 이런 곳도 수많은 조각들을 지닌 기억의 창고로 변한다. 주변의 사소한 것에 얽힌, 그 사연들이 은신처를 삼은 집이 모여 마을을 이룬다. 억압된 일상에서 잠시라도 벗어나고 싶은 아이들, 비행을 저지르는 곳이라 제거의 대상으로만 볼 것이 아니다. 자기 존재의 사유와 상상력을 키우는 장소도 된다. 유년 시절, 아이의 경험은 점차 시간이 흐르며 기억의 원형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 상상력이 어디서 오는지 알 수없지만 대부분 유년의 기억부터라면 이는 대낮의 밝은 곳보다 어둡고 후미진 곳일지도 모른다. 비록 도시의 성장과 변화가 아이들의 놀이터를 바꿨을 지언정 저들의 무의식은 숨을 곳을 좋아하지 않던가. 벽장이나 옷장에 들어가던 버릇 말이다. 엄마의 뱃속 그곳은 집의 원형이며, 생명이 잉태된 원초적 동굴이라 그렇단다. 난곡은 2002년 도시 주거지 재개발로 사라진 도시 마을이다. 이곳은 위치상 서울의 신림7동을 이루며, 낙골이라 불리기도 했다. 쟁반같이 보이는 넓다란 산기슭에 집들이 따개비처럼 다닥다닥 달라붙어 있었다. 제법 격식을 따른 개량 기와집들이 꼭 필요한 거리만 유지한 듯했다. 뜯어보면 모두 낡고 쇠락 했지만 따스한 햇살 아래서는 평안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삶의 거소를 옮기려면, 이는 슬픈 일이기도 하다. 아파트 단지로 바뀌어버린 지금 이전에 살던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도시의 세 켜를 보여주는 사진에서 멀리 보라매공원 옆의 고층 빌딩이 보이는 곳이 도심의 업무지구, 그 아래 능선 사이로 살짝 보이는 곳이 일반적인 다세대 주택지 그리고 앞쪽이 난곡 동네이다. 여기 있던 어린이 공부방의 바깥 벽에 ‘낙골’이라는 글씨가 커다랗게 페인트로 쓰여 있었다. 재현할 수없는 시간의 무늬, 이미 삶이 다르고 되돌아갈 수 없는 곳으로 도시의 여러 마을들이 사라져 갔다.

    “일제강점기까지 도시 외곽이던 이 지역이 큰 주목을 받은 때가 1960년대. 서울 ‘무허가 주택’ 문제 해결을 위한 대책이 묘안으로 떠올랐다. 당시 서울시는 도심의 국.공유지, 사유지를  점거해 사는 이들을 서울 변두리 또는 경기도로 이주시킬 계획을 하였고, 관악구 신림동 일대를 그중 하나로 지목했다. 이에 따라 용산 해방촌, 청계천, 한강 주변, 이촌동, 대방동 등에서 철거민들이 이주해 새 삶의 터전으로 일구었다. 난곡은 이때까지 서울 남부지역 끝에 논과 밭, 숲으로 둘러싸였고 골짜기가 깊어 공동묘지로 있었다. 이주 초기에는 대부분 루핑집, 하꼬방이라 불리던 판잣집 형태이었다. 인구 밀도가 높으나 도로 사정이 매우 안 좋았다. 전기와 수도사정이 열악해 가로등이나 공동수도가 부족했다. 시에서 분양받은 8평 땅에 시작된 난곡의 정착 생활은 고달팠다. 시 당국이 산동네 입구의 하천방제나 치도공사를 벌였다. 하루 500명씩 동원해 닷새 마다 밀가루 한 부대씩 나눠주었다. 이를 통해 주민들은 일용직 건설 노동자로 일 하거나 집짓는 기술도 익혔다.” “주민과의 대립을 피하는 정부와 개발수익을 바라는 건설자본, 부동산 브로커와 복부인 모두 도시주거 문제 해결을 담당했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임의로 규정한 가치 기준에 의해 주민의 삶터를 소홀히 취급해 왔는지도 모른다.”

    참조 및 인용: [난곡아카이브: 난곡사람, 난곡 삶. 관악구] <저소득층의 형태 연구, 양윤재, 열화당> <난곡 이야기, 김영종, 청년사>

  • 영단(집)주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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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ct 15, 2023

    김재경의 PHOTSSAY 28 _no.88 《와이드AR》 2023년 09-10

     

    묻지 않는 답은 없다. 이름이 궁금했다. 쏘다니며 놀던 유년의 놀이터 가운데 그 집이 있었다. 커다란 나무 둥치가 톱에 잘려나가던 제제소, 기계소리로 가득하던 그 집은 규모가 엄청나고 구석구석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 ‘영단집’이, 조선주택영단에서 운영하던 제제소를 줄여 부르던 이름인줄 아는데까지 수 십년 시간이 흘렀다. 

    일제강점기 조선주택영단(1941)을 통해 건설된 영단주택營團住宅은 서민 주택문제 해결을 위해 지은 주택유형이다. 식민지 조선의 전시체제 아래 군수산업 노동자 수용을 위해 공급되었다. 중일전쟁(1937)의 배후 공업도시로 함흥, 흥남, 청진, 원산 등에 군수산업체 노동자 주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형태를 표준화했다. 서울 영등포지구(문래동)와 상도지구(상도동)는 단지개념이 적용됐다. 주택영단 설립에 따른 5개년 2만호 건설계획(경성 부산 대구 인천 대전 수원 군산 진해 평양 청진 함흥 원산 성진 진남포 신의주 나진 평강 사리원 겸이포)은 경성과 인천, 함경도를 병참기지로 바꾸려던 계획을 내비친다. 서울 영등포지구 문래동에 651호, 대방동 464호, 상도동 1,067호, 인천 부평구 산곡동 약1,000호, 남구 용현동 1개 단지 그리고 숭의동 3개 단지를 건설했다. 영등포지구 5개 유형의 경우 갑(20평), 을(15평)은 주로 일본인 관리나 직원을 위해, 병(10평), 정(8평), 무(6평)형은 한국인 노동자나 서민들을 위한 것이었다. 전시체제 아래 도시 건축의 화마를 피할 방편으로 목조에 시멘트 몰탈 칠을 했다. 

    조선총독부의 조선주택영단朝鮮住宅營團 창설은 일본주택영단의 영향을 받았다. 한국보다 앞선 일본 근대화에 주택공급은 주로 대가업자貸家業者들이 담당했다. 당시(1941) 오사카大阪 주택의 90%, 도쿄의 70%가 민간업자의 셋집이었다. 관동대지진(1923) 후 주택재건을 목적한 동윤회同潤會가 주택영단에 흡수될 때까지 18년 동안 겨우 1만호 서민주택 공급에 그쳤다. 따라서 폭등하는 집값 영향이 물가상승을 선도하자 일본 정부는 일본주택영단(1941)을 창설했다. 해방 후 조선주택영단은 주택난 해소 차원의 가치를 인정받아 미군정 감독 아래 존속하였다. 그러나 신규 주택 건설은 미미했다. 일본인 토요타가 건설한 충정(유림)아파트(1930)와 해방 이후에 건설된 종암아파트(1958)는 상징성을 띤다. 해방 전후와 전쟁 이후 태부족한 주택상황에 대한 이야기의 시작점이 된다. 무리하게 추진하던 주택공급 정책의 실패는 와우아파트 붕괴 참사(1970)와 광주대단지 주민 소요사태(1971)로 나타났다. 이에 정책을 바꿔 ‘주택건설촉진법’(1972)을 만들고 ’특정지구 개발촉진법’(1973)이 주택건설과 토지거래 세금을 3년간 면제했다. 대형 민간건설업체들의 참여를 유도한 조처이었다. 정부는 한강변 반포에서 제3한강교까지 70여 만평과 압구정동, 동부이촌동 일대 지역에 서울시가 건축허가를 내지 않도록 했다. 그리고 이곳을 아파트지구로 신설, 운용해 1979년까지 14곳으로 확대해 나갔다. 일상생활공간 물리적 범위를 근린주구 단위로 규격화해 이후 대단위 주택지 모델로 고착된다. 단지중심 공간구성과 편의시설 배분으로 인해 아파트단지의 폐쇄성을 야기한 첫 사례로 기록된다. 한편 이런 근린주구 폐쇄성을 극복한 상계신시가지는 중대형 평형없이 시민들의 차별적 요소를 줄인 사례로 기록된다. 한강변 일대가 아파트 중심의 신중간층 거주지로 탈바꿈했다. 1970년 대 신중간층의 증가와 아파트 공급 확대는 상당한 연관성을 띤다. 분양 평수를 늘리고 자재 고급화가 뒤따르며 단지계획시 주변환경과의 정합성보다 단지 내부공간구성에 집중하는 풍조를 낳았다. 그 결과 자족적 배타적인 단지계획방식의 일반화는 서민아파트와 차별화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60년 대말의 고조된 남북간 긴장상황과 사회적 불안요소에도 불구하고 아파트는 중산층이 선호하는 주택형식이 되었다. 

    한국의 첫 공공주택 공급기관으로서 조선주택영단은 대한민국정부 수립과 함께 대한주택영단(1948)으로 개칭되었다. 이후 대한주택공사법에 의거하여 대한주택공사(1962)로 바뀌고, 국영기업체 대한주택공사는大韓住宅公社 1987년까지 주택을 44만 5,477호 건설했다. 1962년 서울 마포아파트를 비롯하여, 고층아파트(한남외인아파트·남산외인아파트), 맨션아파트(한강맨션아파트·한강외인아파트, 반포아파트·잠실아파트·둔촌아파트), 광명시의 철산아파트, 경기도 과천신도시, 서울 개포아파트·고덕아파트단지, 군포 산본아파트단지, 부천 중동아파트단지, 상계 신시가지와 광명하안지구 등이다. 영구임대주택 14만호(1989~92), 근로자주택 13만호(1991~98). 서울 을지로지구의 도심개발사업(1988~1997) 등을 시행했다. 이후 한국토지공사와 통합(2009)된 한국토지주택공사(LH)는 토지의 취득 개발 비축 공급, 도시의 개발 정비, 주택의 건설 공급 관리 업무를 수행함으로써 국민주거생활 향상과 국토의 효율적인 이용을 도모해 국민경제의 발전에 이바지 함을 목적으로 한다. 최근 국토부의 정책이 연일 세간의 화제다. 국정에 사적 이해가 겹치는 순간 그 정책은 실패의 길로 들어선다. 관은 공공의 이해에 부합하는 정책을 실행해야 한다. 정책의 적실성과 투명성이 흐려지는 순간 신뢰는 땅에 떨어지고 만다.

    참조 및 인용: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도시주택으로서의 아파트, 그리고 아파트 단지 공화국의 탄생 과정, 박철수, 서울 주거변화 100년, 대림산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