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경의 PHOTSSAY 24
옛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다. 웃자란 나무가 시야를 가리고 예전의 산동네는 아파트 단지로 바뀌어 있었다! 월곡역 3번 출구로 나와 20여 년만에 동덕여대를 끼고 오르막길로 접어들자 기대감은 낙담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남은 기억에 의하면 그땐 의연하고 완강한 동네가 산자락을 따라 장관을 연출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몇몇 빈집은 이미 떠난이를 또 장차 바뀔 풍경을 예고 했지만 사람의 동네는 출렁이는 인생의 무대처럼 삶의 기쁨과 슬픔도 여지없이 드러내는 것 같았다. 밤골(밤가시)이 하월곡동 배후의 주거지로 자리한 것은 1960년대 들어서였다. 도심개발로 동대문, 청계천 등지에서 흘러들어온 이주민들이 정착한 곳이다. 전체 3000여 건물 가운데 900여 동이 무허가 건물인, 그마저 지은 지 20년 이상된 건물들 태반이 낡고 또 도로 등 기반시설이 빈약해 주거환경이 열악했다. 이에 성북구는 3단계 개발계획(2000)을 세우고 1단계로 ‘월곡구역’에 대한 재개발사업을 시작했다. 2004년에 입주한 세대가 2655가구, 이어서 2단계 사업으로 ‘월곡 제3구역’에 아파트 27개동 1660가구가 입주했다.(2006) 그리고 3단계 월곡 제3구역과 제1구역의 경우 녹지공간(40%)이 확보됐다. 그 결과 지하철(월곡역)이 가까운 인근의 초등학교와 사회복지관, 중고교 및 대학 등은 교통과 주거환경이 매우 좋아졌다.
1999년, 우리 사회는 21세기 새천년 맞이에 겨를이 없어 기왕의 낡은 주거지가 눈에 띨 수 없었겠지만 그래도 닥칠 시간은 사태를 예고하기 충분했다. 이윽고 의욕이 넘쳐나던 새 시장의 대대적인 뉴타운정책 아래 서울시는 대부분의 주거지를 재편하기 시작했다. 최대 500여 곳의 재개발 대상지가 서울 전역에 펼쳐져 있었고, 당시 부동산중계사무소에서 보던 지도에는 재개발 예정지가 곳곳에 걸쳐 자세히 표시되어 있었다. 큰길에 면한 상가건물 뒤편 배후의 낙후한 주거지는 모두 아파트 단지를 조성한다는 계획이었다. 가위로 오려낸 듯이 정교하게 표시했는데, 미루어보면 일정부분에 걸쳐 재개발 대상에 포함될 건가 하는 결정은 개별 건축주의 동의 아래 추진했을 것이다. 예컨대 아현동의 경우 건축가 김헌의 ‘스푸마토’는 사라지고, 건축가 권문성의 ‘현암사’는 살아 남는 식이다. 이렇게 비교적 새건물이라 할 건축가의 작품(?)도 재개발 의지 앞에선 속수무책이었다.
서울은 젊다. 좀더 자세히는 도시가 젊어졌다는 표현이 맞을테다. 기왕의 낡은 주거지 대부분이 아파트단지로 바뀌었으니 이 도시의 나이에 비해 걸맞지않아 보인다. 도시의 구성체를 한 둘 꼽아서 될 수는 없지만 사물과 시민으로 대별해 보면 이 둘의 관계가 맺은 시간, 곧 역사적 구성물이 전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 일상 서민의 삶이 자리한 집과 동네, 주거지의 생활방식 등은 곧 그 도시의 특성이 된다. 지루한 삶으로부터 여행이 일상의 탈출이고 거기서 받는 인상을 도시의 특성으로 좁혀 말하면 도시의 구조와 건물과 사람이 남는다. 유무형의 도시적 자산은 그 도시의 잠재력이다. 그래서 유럽의 도시적 전통과 유산 앞에서 고개를 떨구지만 아시안 국가들의 도시적 활기는 또다른 매력으로 다가온다. 미국은 어떤가. 250여 년의 근세기 역사가 전부 임에도 도시와 산업적 유산은 우리와 비교할 수없다. 이런 점에서 도시 서울이 추구하는 모습은 또 어떤가. 많은 일을 동시적으로 추진해야만 했던 저간의 사정도 있었지만 이제는 도시의 흔적을 지우는 개발을 멈춰야 한다. 이런일이 계속될 경우 아시안 국가로서 한국이 점점 인구가 줄어들고 있는 마당에 도시의 활기조차 기대하기 어려울 수 있다. 담장을 둘러치고 블럭화 된 아파트단지들이 많을수록 그 지역의 활동이 둔해 질 것이기 때문이다. 작은 집과 건물들이 모인, 제각기 허물고 짓기를 무한 반복하는 도시는 살아있는 도시다. 문화는 다양함 속에서 꽃을 피운다. 우리의 가치관이 아파트에 매몰된 삶으로 계속될 경우 그 영향은 사회에 그대로 반영된다. 경제력과 문화는 사람이 중심이다. 아파트단지로 잠식되는 도시의 미래보다 다채로운 삶이 가능한 미래를 바래본다.
참조: [세계일보]
_no.84 《와이드AR》 2022년 11-12
김재경의 PHOTSSAY 23
디지털 세계는 언제나 새것의 세계이다. 이 세계의 SNS 정보와 의견은 호기심을 주는 대상이다. 이미지는 표면에서 반짝인 다음 이면으로 사라지고 자신을 부르는 신호가 잡힐 때까지 긴잠에 빠져 든다. 간혹 호출로 깨어나 현재로 불려온 지난 시공간 속에서 과거의 사진(디지털)은 기쁨을 주거나 의문을 던지기도 한다. 사진의 흐름에서 양차대전과 냉전시대를 통해 형성된 현실의 눈은 일상에 가 닿았고 또 현대사진의 가교로서 도시의 인공적 풍경과 정경이 사진으로 남았다. 시대가 사람들 인식에 미친 영향이 반영되기 때문이다. 반면에 사진 사조의 발전 아래 주류 미술시장에서 현대사진의 위상을 보면 관심의 크기를 볼 수 있는데 천문학적 거래가 뿐만아니라 이미 사진이미지는 생활세계에 넘치고 넘친다. 매순간 핸드폰 영상으로 찍히고 소비되고 축적되는 사태는 현실 그 자체의 구성물로 자리 매김했다. 그 가운데 필름의 귀환처럼 보이는 현상, 즉 필름을 스캔해 디지털로 소통하는 새로운 감성을 보면 이런 디지털 필름사진이 아날로그에 대한 향수로 작용해 인스타나 트윗이 붐비는 것일까. 그도 아니라면 돌아갈 수는 없는 그 때의 감성이 다시 온 것인가 생각해 보았다. 핸드폰 카메라와 더불어 이미지 처리 성능이 강화되자 다양한 메뉴 중 선택할 수 있게 되었어도 직접 필름에 찍은 사진의 느낌을 선호하는 듯하다. 그러나 현실을 떠내는 도구로써 기계시대의 사진기는 감각의 화석이 된다해도 디지털 위세는 폭주의 궤도 위를 멈추기 어려울 것이다. 이렇게 물질이 코드로 전환된 사진세계는 오히려 현실과 비 현실의 경계를 초월해 지각을 흔들어 깨우는 각성의 기제로 작용할 수 있으나 그 끝모를 가능성이 어디까지 또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간 시대가 다시올 수 있다면 그조차 코드의 변형(실제와 가상이 뛰바뀐 세계)이든, 아니면 현실의 공간이 휘어져야만할 텐데 지난시대는 다시오지 않을 것이며 기계의 감각을 유지하는 것조차 미망으로 남을 것이다.
‘신선이 노니는 곳’으로 불리던 선유봉은 한강의 아름다운 정취와 서울의 산자락을 바라보던 곳이었습니다. 예로부터 양화나루와 강 건너 망원정, 마포 잠두봉을 잇는 한강의 절경으로서, 조선시대 중국 사신들 사이에 “조선에 가서 양천현(양천구 일대)을 보지 못했다면 조선을 보았다고 말하지 말라” 했을 만큼 한강 일대의 빼어난 풍광을 지닌 곳이었습니다. 그 봉우리를 허물어 메운 선유도(1920년대)에 수돗물 공급시설인 정수장(1978)이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그 기능을 마치자 도시민 휴식을 위한 공원을 만들려 공사중(2001)이었습니다. 이미 신선이 떠나간(?) 자리에서 그 아우라의 자취는 하나도 없었고 오로지 건너편에 보이는 풍광을 바라보며 옛 시절을 가늠하는 정도 이상의 생각은 접었습니다. 이상과 동떨어진 간극 만큼이나 현실이 눈 앞을 차지했기 때문이죠. 다만 흑백사진의 톤으로 추상의 세계를 현시할 수 있도록 조절했습니다. 촬영에서 시간(-2)을 당기고 필름 현상에서 미(+3)는 적극적인 수단을 취했습니다. 공사 중의 현실보다 향후 완성된 공원에서 떠올릴 수 있을 법한 이상향을 그렸다 할 수 있겠으나 이는 하나의 몸짓일 뿐입니다.
시각자료 중심인 매체 인터넷은 세계를 손에 잡힐듯이 보여 준다. 즉각적이고 간편해서 마치 세계가 손가락 끝에 달려있는 착시를 형성한다. 인터넷이 최적화한 정보의 세계에서 가벼운 이미지를 탓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물질의 세계에 속한 인간의 몸으로 날고자 한다면 날개가 필요하고 그조차 가능하려면 새가 아닌 이상 어려운게 사실이다. 그래서 정신의 승리를 위해, 건물이 몸이고 건축이 새라면 모든 건축가는 날으는 꿈을 깰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종교적 초월과 해탈을 통해서라도 인간은 제각각의 수단으로 날기를 도모하는 것일테다. 하지만 바닥을 두드려 지붕을 세우고 별을 보려는 건축은 몸을 떠나 존속할 수 없는 숙명 또한 지녔다. 그만큼 영혼을 키우고 지키기 어려운 순간들로 가득찬 현실은 넘기 어려운 벽이 된다. 소설 ‘파운틴헤드’는 법정에서 하워드 로크가 자신을 변론하며 무죄를 주장했다. 이는 학생으로서 대학의 퇴교 조치에 “나는 내 기준을 내손으로 만들겠다.”는 결심에 따른 일이었다. 집산주의에 맞서 개인의 고결성을 지키려던 일이었고 이는 개인주의적 위험 요소를 떠나서 뜻하는 바가 적지 않다. 세운 뜻을 위해 돌이키는 용기. 지금 여기의 삶은 순간마다 선택적으로 흐르고, 빠른 속도 위에서는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인터넷은 우리의 시간 감각을 마비시킨다. 그렇게 우리 망막에 호소하는 이미지들의 향연에 취해있는 동안 덧없는 시간 또한 흘러 간다. 후설의 말에 따르면 “우리의 의식은 반성의 주체와 대상 사이를 오가며 흐르는데, 이 ‘시간의 근원’을 의식하지 않는 한 그 존재를 느낄 수 없다.” 밖을 보니 꽃이 진다.
참조: (선유도공원화사업 1999~2002, 조성룡.정영선, 서울특별시 한강사업기획단)”, (마천루1.2, 아인 랜드, 도서출판 광장), (20세기 건축의 모험, 이건섭, 수류산방.중심), (살아 있는 시간, 이종건, 궁리)
_no.83 《와이드AR》 2022년 09-10
김재경의 PHOTSSAY 22
구한말 이래 대한민국 역대 정부조차 가까이할 수 없었던 땅이 120여 년만에 돌아온다. 강점기 일제가 붙인 이름이 적지 않은데 이땅도 그 중에 하나이다. 구한말 개화파와 수구파, 신식군대(별기군)에 비해 처우가 형편없던 구식군대(무위영, 장어영)의 폭동은 임오군란(1882)이 된다. 이에 일본 세력의 확대를 견제하려 청국은 군대를 끌고 들어와 용산(남단, 둔지미) 일대에 주둔했다. 이후 대륙 진출의 야욕을 품은 일본이 러일전쟁(1905) 직후부터 이곳을 영구적인 주둔지로 구축해 나갔다. 조선주차군 78, 79보병연대 주둔을 시작으로 확장을 거듭해 이른바 ‘용산군영지’는 장차 대륙으로 가는 기차역의 시발점이 된다. 철로가 부설되고 관사를 짓고 학교, 병원 등 부대시설을 갖추며 계획 도시를 구축했다. 부산에서 출발한 기차는 철도도시 용산역에 정차한 후 경의선을 달려 만주로 대륙으로 이어지도록 했고 전쟁 물자 수송의 발판을 꾸렸다. 일제가 패망하자 보병79연대 자리에는 육군본부(1958~89)가 들어왔고, 나중에 계룡대(논산)로 빠져 나가자 그 자리에 전쟁기념관이 들어섰다(1994). 해방 직후 주한미군사고문단이 잠시 사용했던 용산기지가 대한민국 정부의 공여절차(1952)를 거쳐 미군이 다시 사용하게 된 것은 6.25전쟁이 끝나고 난 뒤부터다. 나중에 일부 미군골프장 일대가 반환되자 용산가족공원(1992)과 국립중앙박물관(2005)이 들어섰다. 그리고 한국과 미국정부 사이에 ‘용산기지 반환협정’(2004)을 체결하고 대대적인 반환을 추진했다. 이에 한국 정부는 여의도 면적 5배에 달하는 ‘평택미군기지’(2017년 이전 완료)를 조성해 대체했다. 그러나 ‘용산공원조성특별법’(2009) 아래 민간의 사용을 앞두고 이 땅의 오염토 정화 비용처리 문제는 한미간 미제로 남아있다.
쾌청한 여름날, 길 옆에 나란히 놓인 부스는 제각각 놀거리와 먹거리로 방문자의 흥을 돋우었다. 휴일이라서 그런지 사람들이 북적이고, 머리 위에서 종이 성조기가 바람결에 흔들리고, 파란 하늘이 그 뒤로 배경처럼 펼쳐졌다. 한 어린이, 아이스크림과 풍선을 양손에 쥐고 간다. 그 모습에 비친 햇살은 평화로왔다. 또 커다란 물통 위, 매달린 의자에 누가 앉아 있었는데, 가을 운동회 때 오재미 던지기로 바구니를 터뜨리듯, 공을 던져 사람을 물에 빠뜨렸다. 빛바랜 사진처럼 즐기던 사람들의 웃음소리는 귓전에 남았고 그밖엔 지금 머릿속이 하얗다. 하지만 빌리지 풍경 만큼은 남아서 잔디와 나무 사이로 낮은 집들이 듬성듬성이 보였다. 그날 용산 미8군 영내에 들어간 일은 미국독립200주년(1976)기념일에 미군을 따라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나는 세들어 살던 집(공항동) 건넌방에 살림을 차린 미군과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휴일이면 쌍절곤을 돌리고 캔맥주를 얻어 마시거나 팝송을 흘려 들었다. 그이는 뽀얀 살결에 깨알 붉은 점이 얼굴에 팔뚝에 가득했으며 품성이 너그러웠다. 붉은 머리에 붉은 털, 지금 생각하니 아일랜드계 미군인 듯하나 그땐 알지 못했고 막 고교를 졸업하던 해였다.
인생에 자기 집짓기는 겨우 한 두 번 맞이할 일이란다. 그 조차 기회는 드물지만 집짓기에 치밀한 계획은 필수이다. 일의 규모와 계획에 따라서 방향이 정해지면 그다음은 시간 문제. 어쩌면 꿈이, 현실의 눈앞에 펼쳐진 감동을 경험하지 않은 이가 필설 할 일은 아니지만 때때로 우리는 일의 순서가 뒤틀려 괜한 수고를 치르곤 한다. 새 정부가 들어서며 말들이 많다. 청와대(개방에 앞서 근대문화유산으로서 일대의 사전조사가 없었다.) 이전 문제에 이어 용산공원 개방을 위한 일련의 일을 보면 앞뒤가 뒤바뀐 듯하다. 유독 기름 유출사고가 잦았던(1990~2015 기간동안 84회, 녹색연합 통계) 이 땅에 대한 정확한 조사가 먼저이고 그 다음의 일들이 뒤따라야 한다. 어느 공사 중에라도 유물이 나오면 즉시 중단하고 발굴을 끝마쳐야 비로서 공사가 재개된다. 역으로 문화재 지정을 앞둔 건물(스카라극장)이 헐렸다는 뉴스는, 제재를 받기전 사적 재산권을 행사한 경우이다. 이런 일들은 대개 공공이 개인의 이해를 제한하고 따라서 민간과 시민이 이를 따르는 법을 제도로 삼는 나라의 일이다. 이렇게 보면 ‘용산임시(영구)공원’ 개방을 둘러싸고 해결할 문제가 한 둘이 아니다. 환경정화처리비용 문제, 임의 결정사항이 아닌 군사시설 문제, 문화재 관련 사항, 방공 방호 경비, 시민의 의견 등을 제치고 너무 급히 나간다. 해당 관련 부처의 사전 노력을 수포로 돌리고, 인기에 소비될 수 없으며, 산적한 문제를 해결한 다음 후대의 유산으로 남아야 한다. 그래서 당대에 사용이 늦어도 좋을 미래의 땅으로 남아 제국과 이념이 갈라놓은 심연의 그늘진 땅을 회복해야 한다. 절호의 기회다. 당국자는 책임을 다해 국토를 관리할 의무를 지녔다. 정책의 방향과 계획의 일관성이 무너지면 당국의 신뢰는 땅에 떨어지고 만다.
참조 및 인용: <용산, 빼앗긴 이방인들의 땅. 이순우. 민족문제연구소>
_no.82 《와이드AR》 2022년 07-08
김재경의 PHOTOSSAY 21
우리 주변에는 틈새 공간이 많다. 눈여겨보면 자투리 땅에 심기운 상추도 보이고 파나 푸성귀를 심은 사람의 손길도 보인다. 꽃을 가꾸는 마음은 주변을 변화시켜 온화하고 따사롭게 하는 힘이 있다. 햇살 비치는 골목 담벼락 아래, 한 뼘 화단이나 스치로폼 박스는 식물을 키우고, 가까이 바람결에 흔들리는 메리야스와 빤스는 한가한 도심 주택지의 프로필이었다. 밀집된 고층아파트라면 이런 틈새 공간을 찾아내기 어려울 테지만 그동안의 밀집 주거지나, 일반 주거지의 사무실, 상점들이 뒤섞인 곳에는 어김없이 옥탑방이 있다. 일터에서 가깝고 싼 값에 삶의 공간을 마련하기 더없는 곳이며 남의 시선이나 방해를 받지 않고 혼자서 공간을 누리는 색다른 맛이 있다. 협소한 환경이 쾌적하다 할 수 없으나 학생, 직장인, 전문인, 혹은 신혼부부도 살림을 꾸리는 대안 공간을 자처한다. 싱글의 주거로 장점도 있으니, 널찍한 옥상마당의 전망은 답답한 일상에 활력을 준다. 누군가 경사지 높은 곳에 위치한 옥탑방을 얻었다 하면 펜트하우스 부럽지 않은 경관은 덤. 그런 옥상에서 채소를 가꾸고 화초를 키우는 사람, 평상에 나앉아 여름 더위를 식히는 사람, 빨래 너는 사람, 운동하는 사람 등 활용이 매우 다양하다. 고향을 떠나 도시로 찾아 들어온 사람이 편히 쉴 수 있는 장소이며 한 때의 꿈을 키우기에 적절한 공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옥탑방 생활은 그만큼 감내할 것이 많다. 옥탑방은 기존 건물에 덧붙여진 부차적인 공간으로, 스스로 해결해야 할 일이 많다. 덥고 추운 환경도 그렇지만 이미 경제적인 여유가 없기에 선택하는 공간인 만큼 넉넉한 생활의 여유는 찾아보기 어렵다. 60~70년대 산업화 시기에도 도시로 몰린 세대는 싸구려 단칸방을 찾거나 반지하 셋방을 찾아 다녔고, 일터의 환경이 군색해 간이 숙소든 아예 거기서 먹고 자는 형식이든 가리지 않은 것은 이들이 도시에서 기회를 찾았기 때문이다. 아픔이 따르나 그래도 가능성이 아주 없어 보이진 않았다. 대다수의 처지와 형편이 그랬듯이 이런 사회적 분위기는 당시의 문학작품에서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여전이 사회는 우리에게 도전의 대상이고 저마다 꿈과 좌절을 안고 살아야 하는 점에서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런 점에서 시간은 장소에 사건을 만들고 그 공간을 채운 이야기는 기억으로 남아 퍼져 나간다. 개인의 기억이 다수의 기억으로 번지듯이 특수는 보편으로 옮겨 간다. 이렇게 일반화된 체험은 어떤 사실 앞에서 우리의 감성과 이해가 찰라적 공감을 얻는 밑바탕을 이룬다. 서로 공감이 가능한 상식이 넘치는 사회는 열린사회, 너그러운 이해는 감사와 존중이 뒤따르는 식이다. 발레 파킹처럼 누군가 자발적 시민의 재치는 도시 주차난 해소에 기여하거나 포장마차, 푸드트럭이 지역에 활기를 불어 넣는 순기능이 좋은 예다. 이처럼 현실 에서는 공식(Formal)과 비공식(Informal)이 서로를 보충하며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따라서 옥탑에 붙어 사는 거주의 삶에서 자기 존재 곧 실존에 대한 탐문이 가능하다면 이는 전적으로 삶의 형식에 달렸을 터인데, 가진것이 적은 단순한 삶이야 말로 필수 조건에 가깝고, 그래서 자신을 소유할 수 있는 최상의 환경일 지도 모른다.
“멀리서 탑처럼 보인다 해서 붙은 옥탑방屋塔房의 법적 이름은 옥상옥이다. 원래 건물의 옥상 출입을 위한 계단 입구 또는 옥외 물탱크를 설치한 15평 가량 작은 방 형태의 구조물을 개조한 것이다. 수도법이 바뀌자(1990) 물통을 빼내고 그 자리를 정리한 후 얻은 여분의 공간이다. 허가받은 건축 면적과 용도에 기반한 세금 부과는 개조 후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따라서 옥탑방으로 개조 후 내놓은 월세는 알토란 같은 수입이고, 세제상의 이점을 챙기는 방식으로 진화했다. 그러나 이런 관행이 오래 갈수는 없었다. 법적 양성화 과정을 거치며 과세 대상이 되었고, 옥상 구조물을 항공사진으로 찾아내 과징금 또는 이행강제금 조로 세금을 매긴다. 그조차 요즘은 기왕의 주택지 재개발에 따른 주거지 변화와 수요 감소로 점점 줄어드는 추세다. 일반 주거시설에 비해 환경이 낮은 편이지만 2010년 이후 애초에 주거공간으로 지은 옥탑방은 신축 원룸, 투룸에 비해 거주의 쾌적성이 밀리지 않는다. 너른 옥상 마당으로 나가 바깥 바람을 쐬거나 가벼운 운동 그리고 빨래 건조에 탁월하다. 주변 경관이 좋으면 도시의 야경을 즐길 수 있으니 원룸에 비해 뛰어난 장점이다. 반면 여름철 내리쬐는 지붕의 복사열과 겨울철 한기는 거주자가 견디기 힘든 요건이다. 여름철 옥상에 물을 뿌리거나 지붕에 농업용 망사그물을 드리우고, 겨울철엔 비닐하우스를 덮는 두꺼운 비닐을 벽에 두르거나 우레탄폼과 스펀지 등으로 창문에 스미는 한기를 차단한다. 화재 때에 옥상으로 대피하는 출입문을 함부로 차단할 수 없다.”
참조 및 인용 : [나무위키]
_no.81 《와이드AR》 2022년 05-06
김재경의 PHOTOSSAY 20
중계본동 '백사(104)마을'(노원구 중계본동 30-3번지 일대)이 올 초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서울시와 노원구, 서울주택도시공사(SH)는 '개발과 보전,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상생형 주거단지'(총 2,437세대: 공동주택 1,953세대, 임대주택 484세대)로 변신을 예고(2025년 완공)했기 때문이다. 낡은 저층 주거지의 특성과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는 방식의 개발, 백사마을 만의 차별화된 창의적 건축디자인이 나올 수 있도록 ‘특별건축구역’으로 지정해 부지를 총 28개 영역(공동주택용지 5개, 주거지보전용지 23개)으로 나누고, 총 15명의 건축가를 배치해 각기 다른 디자인으로 건축계획을 수립하도록 했다. 시 관계자는 “백사마을은 재개발로 인한 기존 거주민의 둥지 내몰림을 최소화하는 동시에 도심 내 대규모 주택공급이 가능함을 보여주는 상생형 주거지 재생의 새로운 모델”이며 “다양한 유형의 재생 모델을 지속적으로 발굴, 적용해 낙후된 주거환경을 개선해 나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일제강점기 이후 도시저소득층의 주거형태로 고착된 무허가 불량주택이 서울시 도시화정책 아래 철거민을 양산한 시기는 1960년대. 서울 인근의 적절한 구릉지를 정착지로 택했으며 백사마을이 이들을 수용하는 ‘이주민 정착지'로 지정된 해가 1967년이었다. 용산과 영등포, 청계천 등지에 살던 도시 빈민들이 이곳으로 내몰려 들어왔다. 한 가구당 8평 땅, 시멘트블록 200장, 천막1동이 지급됐다. 그게 전부, 나머지는 각자 알아서 해결하는 식이었다. 해가 바뀌며 이떤이는 뒤 늦게 들어와 터잡이로 살거나 또 누구는 값싼 땅을 매입해 공장을 운영하기도 했다. 저마다의 사정이 딱하지 않을 수 없기는 여기로 들어온 처지를 보아 짐작할 수 있으나 실제로 말을 들어보면 모두 삶이 힘겨운 사람들 뿐이었다. 비록 일제 식민기와 전후의 없던 시절에 어렵지않았던 이가 있을까 십지만 그중에 더욱 갈곳없던 이들이 살던 도심 외곽에 위치한 ‘이주민 정착지’이었다. "첫 이주민이 들어온 후 십여 년 지나자 마을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마을 초입에 시장통이 형성되자 사람들이 붐비고 활기로 가득했다. 하루에 몇번 오는 버스는 길게 늘어선 마을 사람들로 가득찼다. 그 무렵에 전기가 들어왔으나 물은 공동 우물에서 길어다 먹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교통이 불편하고 살림은 옹색했어도 맑은 공기와 자연 속에서 따뜻하고 끈끈한 공동체 생활이 이어졌다."(노원구 소식지)
“그때 동대문 막살이집촌에 살다가 불이 나는 바람에 집을 잃었지. 판자촌이니 순식간에 재가 됐어. 다른 이웃들과 80여 명이 여기로 흘러 들었어. 나랑 남편도 4남매를 데리고 왔는데 천막 하나 내준 게 고작이었어.”(최ㅇㅇ 88세) “남은 사람 중 여기 계속 살 수 있는 사람은 열에 서너 명도 안될 것”이라며 “새 아파트 추가 분담금이 3~4억원 정도로 예상되는데 실제로 그렇다면 입주권을 팔고 서울을 벗어날 수밖에 없다. 정부에서 융자를 해준다고 해도 나이 먹은 사람은 평생 갚아도 못 갚는다. 이 동네 사람들의 한이 될 것.”(김ㅇㅇ 60세) 주민대표회의 위원장(황ㅇㅇ)은 “분담금 때문에 다른 곳으로 이주하는 일은 어느 재개발이나 다 있다”며 “조합원 분담금도 지금 아파트 시세에 비해서는 엄청 싼 금액이고 차액이 있으니 그걸로 또 집을 장만할 수도 있어서 쫓겨나는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이어 “중도금, 잔금 대출은 SH나 시공사에서 도와줄 것”이라며 “외부인들이 들어오는 것도 있는 사람들이 여윳돈을 갖고 사는 건데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지역, 풍토, 관습 그리고 무엇보다 시간에 따라서 삶의 양태가 다를 수 있다면 주거는 이를 잘 드러내 보이는 것들 중 하나이다. 춥거나 더운 지역은 물론이고 온화한 지역도 생활방식의 차이와 문화는 그 흔적을 그대로 집에 새긴다. 삶이 평탄한 태평시대나 그렇지 않더라도 그 시기 집의 양식, 장식 또는 가구와 집기 등 크게 보아 일상과 예술적 활동의 성과로 남아 후대 사람들에게 말을 전한다. 삶은 고정되기 보다 흔들려 불안한 것이고 사건 사고의 집합은 진보의 노정 그 자체이다. 시대 속에서 부대끼거나 역으로 밖에서 어느 시대를 조망한다는 사실은 현실과 비 현실 만큼 격차가 클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삶의 골격과 살을 이루는 집은 지금 여기 우리의 얼굴 그 자체에 다름아니다 할 수 있다. 몇 십년 동안의 시대적 요청 아래 대량 상품으로 바뀌어 버린 작금의 주거 현실, 누추한 곳을 지우고 아파트단지로 가득찬 도시, 그 바탕의 모습을 기록한다. 처음 관이 주도해 이주민을 소개했던 장소에 주민 스스로 건물을 지었고 섬유질 같은 거주의 원초적 갈망이 보이는 ‘자생적 정착지’로 남은 까닭이다.
참조 및 인용: <서울시 도시재생실주거재생과 자료>, <서울 중계동 백사마을의 건축적 특성 연구_장용해,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경향신문] [동아일보] [위클리 리포트]
_no.80 《와이드AR》 2022년 01-02
김재경의 PHOTOSSAY 19
“1960년대부터 도심을 본격적으로 정비하기 시작했던 서울시 ‘재정착사업’, 외곽지역에 형성한 ‘신월6동 이주단지’는 이런 시책 아래 70년대 초에 형성되었다. 이때 조성된 이주정착지는 80년대로 접어들며 다가구주택단지 또는 재개발지구로 지정돼 아파트단지로 변모해 나갔다. 그리고 후일 재정착 사업의 방향이 바뀌자(주택개량 촉진에 관한 임시조치법) 서울에 조성된 마지막 재정착지로 되었다. 전면철거(2017)된 ’신월6동 이주단지’는 최근 뉴타운재발사업을 완료했다.
이곳으로 이주한 첫해(1973)에 집을 지은 이는 없었다. 이주민들은 기왕의 거주처에서 철거한 판자를 수거해 실어다 주는 조건으로 천막 1동을 지급받고 이주정착지조성사업에 동참한 셈이다. 집짓기는 다양한 방법으로 전개되었다. 당시 건축법의 최소대지면적 27평 아래 ‘15평 단지집’은 불가능 했다. 따라서 30평 대지에 1호 주택, 2호 주택으로 건축허가가 진행되지만 동시에 똑같은 형태로 한번에 지은 ‘작꿍집’은 드물었다. 형편대로 일부만 먼저 짓고 나중에 문간채를 짓거나 하는 식이었다. 동네목수와 이웃들이 함께 건축팀을 구성해 집을 짓는 등 상황과 여건에 따라서 ‘15평 단지집’이 건축되는 양상은 각기 달랐다. 30평 대지를 좌,우로 나눠 15평 집을 짝으로 지었다. 총 492개 필지 중 상가는 173필지에, 30평형 40개 필지를 제외하고, 좌우 각각 15평으로 나뉘어 건축된 299개 필지 가운데 속칭 ‘짝꿍집’(데깔코마니 그림처럼)이 된 집이 110개다. 이후 거주민의 편의대로 집을 고치며 변화하기 시작했다. 사정에 따른 변화는 거주민이 주도한 형태로 찾아왔다. 형태를 그대로 유지한 집, 평면이 바뀐집, 대문간의 입면이 바뀐집, 지붕이 바뀌거나 하나로 합한집, 지붕 일부를 증축한 또는 좌우 같은 형태로 전체를 증축한 ‘짝꿍집’, 좌우 분리해 신축한 다가구 형태, 더나아가 아예 좌우를 통합해 신축한 다가구형태 등으로 분화했다. 그리고 2000년대 초반 30평형 3개 필지를 통합해 필로티형 다가구로 신축한 집도 있지만 뉴타운재개발 논의가 진행되며 단지 내 변화의 양상이 멈췄다. ‘신월6동 이주단지’의 ‘짝꿍집’은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연속되는 특이한 골목경관을 연출했다. 이는 특수한 조건 아래 계획된 토지구획 틀이 유지되며 이주민들의 자율적 건축문화가 형성된 사례이다. 약 45년에 걸친 대도시 서울의 변화를 받아들이며 특이한 ‘신월6동’의 경관을 형성했다. 전면 철거(2017.5)되어 이제 그 모습을 볼 수 없으며, 서울 도시-주거사의 한 장면이 되었다. 이주민들을 국공유지에 강제 소개했던 종전의 방식과 달리 서울시의 도시계획적 절차(토지구획정리사업)를 통해서 조성되었다. 토지소유권이 불하되어 자유로운 건축이 가능해 다양하고 역동적인 변화가 일어날 수 있었다.” *
“이제 역사에 한 페이지로 남을 신월 6동은 지금 이주가 막바지로 90퍼센트 이상 빈집으로 남아있다. 아이들이 어릴 적 뛰어 놀던, 놀이터 신남 초등학교 다니던 아들, 딸들, 중.고등 학교 졸업하고 대학을 다녔던 이곳에서 자식들 결혼시켜 분가한지 얼마 안 되었는데. 정들었던 고향 이웃들 이제 다 어디 가고 나 혼자 남아서 추억을 담고 있나. 이제 다가올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오기 전에 산, 산 이 부서져 버릴 건물들과, 골목 즐거웠던 추억들을. 무엇으로 보상할 수 있을까. 40년 전 목재 학고방 천막으로 지붕을 덥고 작두 우물을 길어다 먹고 살던 어려운 시절, 추운 겨울을 연탄불로 덥혀 가면서, 초상이 나면 골목 한가운데, 연탄을 피우고 천막을 치고 동네 이웃들이 밤을 새우던 이곳 머나먼 싸우디. 아라비아 더운 나라까지 가서 돈 벌어다가 15평 에다 2층집을 짓고 애들과 얼마나 좋아했던 이집 손수 벽돌 쌓고 미장하고 도배했던 이집이 철거 되고, 분담금 때문에 아파트도 못 들어간다니. 슬픔이 쓰나미 처럼 밀려온다.” **
* 출처: 신월6동 짝꿍집의 건축형태와 변화양상 특성_안화영,이상구(한국도시설계학회지 도시설계 19(3))에서 인용
** 출처: 미래사진.(2016년) https://blog.naver.com/mrgs7255/220643761896. 글쓴이의 호흡 그대로 인용
_no.79 《와이드AR》 2021년 11-12
김재경의 PHOTOSSAY 18
만리현(萬里峴)과 대현(大峴) 중간의 작은 고개 애고개, 한자로 아현(兒峴)이 나중에 아현(阿峴)으로 바뀌었다. 한성부(성저십리)에 속했던 아현은 소의문(서소문) 밖이라 장례 풍습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도성 안에서는 매장을 금지해 장례 행렬이 소의문, 광희문으로 나갔다. 일제 강점기 경성부는 고시정(후암동)과 도화정, 고양군 신당리, 북아현리 등의 토막촌 인구(1940) 삼만 여명을 홍제정 돈암정 가현정 등에 분산 수용했다 하므로 후일 달동네 형성의 근간이 되었다. 해방 전후에 걸쳐 서울은 이농민과 피난민이 넘쳐 판잣집이 늘었고, 미아리 ‘정착지사업’(1959)이 효과를 보이자 상계 중계 도봉 창 쌍문 구로 사당 신림 봉천 가락동 등 서울 외곽지로 분산(1970)시켰다.
서울 도심에 가까운 아현동은 상권을 발전시킨 신촌과 홍대 부근의 인접 동네와 달리 발전이 더뎠다. 중림동과 아현동 사이 막힘없는 차량 흐름을 위해 건설한 굴레방다리는 아현동의 다른 이름 같았다. 한 때 아현고가도로의 준공(1968)은 청계고가, 서울역고가와 함께 서울 근대화의 상징으로 불렸으나 시대가 바뀌자 이 일대에 변화의 바람이 불어 왔다. 마포대로 변 아현뉴타운(2003) 사업과 서대문구 일대를 재개발하는 북아현뉴타운(2005) 사업이 추진됐다. 하루 8만대 차량이 다니던 아현고가도로는 철거(2014) 후에도 정체가 심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됐다. 그리고 작년 북아현1구역 3곳이 입주를 끝마친 데 이어서 곧 시작될 북아현2, 3구역 사업이 완료되면 가구수 1만 여 아파트의 뉴타운으로 재편된다.
무더운 여름철에 시원함이 사라진 미역국수는 먹을 수 없었다. 일용직 공사장에서 먹던 참이 생각나 만든 냉국수, 너무 많이 부풀어 오른 미역 때문에 도무지 먹을 수가 없었다. 그곳 사촌이 정착해 살던 70년대 아현동 셋방 풍경은 어디나 비슷했던 다른 동네와 매 한가지였다. 굴레방다리 주변에 꽉 들어찬 집들은 생활비를 보태려 방한칸이라도 세를 놓았으니 도시로 올라온 청춘의 꿈 자리 같았다. 자취방 하숙방 등 각자의 성취를 위한 교두보, 혹은 허기진 영혼의 처소로 적당할 고만고만한 집에 비슷한 처지의 살림살이는 집주인과 세입자 서로에게 흠결 사항이 아니었다. 어떤이는 제집이 아니기에 세들어 살며 도시의 삶을 꾸려야 했고 또 어떤이는 청운의 꿈으로, 그렇게 서울살이는 각자에게 주어진 숙명처럼 받아들였다. 그무렵 시작된 강 건너편 도시개발이 향후 주거에 미칠 영향은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시나브로 삶을 담아내야 할 집이 부동산에 저당잡혀 한낱의 상품으로 변해 갔으며 간혹 턱없이 튀는 서울 아파트 시세는 전국에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자기 소득으로 감당할 수 없는 내집 마련에 대한 현실의 벽은 미래를 어둡게 하고 청년 삶의 희망이 점점 힘을 잃어간다. 집의 효용과 재산 가치의 격차가 크면 클수록 현실의 삶이 시들어 간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그러나 이런 말조차 불편하거나, 오랜 꿈과 노력이 결실을 맺어 곧 새아파트에 입주할 혹자의 부푼 마음에 상처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함께 있으니 이미 내면화 된 증상의 징후는 이중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주성과 집짓기에 대한 고민이 끊이지 않는 것은, 그것이 주거의 원초적 형상에 가 닿아 있기 때문이다.
“집 곧,
우리의 내밀한 존재의 지형인 집은,
기억을 저장하고 영혼이 거주하는
어둠(무의식)과 빛(초자아)이 있는
지하와 다락을 갖는다.
뿌리도 하늘도 없는 빌딩과 아파트는
컨테이너다.
…
탄생과 관혼상제가 제거된, 다만 자아로 팽창되거나 쭈그러든 텅 빈 공간이다.
친밀성 없는 집은 형식(크기와 위치)이 가치다.”(이종건)
참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숨 멎은 공간(이종건, 연두)
_no.78 《와이드AR》 2021년 09-10
김재경의 PHOTOSSAY 17
"조선시대 한양에서 강화도 연미정에 다다른 배는 염하를 거쳐 서해로 나아갔다. 한강은 통진 서남쪽에서 굽어져 갑곶나루가 되고, 남쪽으로 마니산 뒤의 움푹 꺼진곳으로 흐른다. 물속에 돌맥이 뻗쳐 문턱 같으며, 복판이 조금 오목한데 여기가 손돌목이다. 삼남 지방에서 조세로 거둔 쌀 실은 배는 손돌목 밖에서 만조 때를 기다려 건넜고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돌맥에 걸려 파선했다." 고려 때 인주가 인천(조선)으로 바뀌고 조정은 관아를 도호부로 승격했다. 승학산(아후산) 자락의 인천도호부가 문학산을 바라보는 것은 뱃길을 고려한 것이었다. 사모지고개(삼호현) 너머 옥련동 능허대는 사신들이 중국을 오가던 한진 포구가 있었고, 한양 길은 만수동 비루(별리)고개 밖에서 김포로 나가 한강을 건넜다. 근세기 제물포 개항(1883)은 시대의 요청이었고 열강의 압박 아래 일본, 청국, 각국 조계를 정하고 나자 선창으로 물자와 사람이 밀려들었다. 선창에 내리면 해관이 있었고 응봉산(자유공원) '청.일조계지 경계계단’ 아래 한양길 여행객이 묵어 가던 대불호텔, 스튜어드호텔이 마주했다. 해망대(올림포스호텔 자리) 곁의 선창은 후일 그곳을 객선부두, 연안부두(1973)라 불렀으나 월미도 소월미도 사이에 갑문을 설치(1918)해 내항을 건설하며 사라졌다. 중구청(일본영사관) 앞 중앙동 일본제1, 제18, 제58은행 길 본정통은 한 때 도쿄 중심가 못지않은 풍경을 연출했다. 문학에서 이십리길 제물진은 개항과 더불어 경성가는 새길이 필요했다. 경동 싸리재 너머 쇳불고개(우각로)를 지나는 경인가로와 제물포-노량진 간 철로(1899)는 갯골을 피해 택한 필연의 코스였다. 그리고 탁포(조선인 포구), 청국인 푸성귀시장(신포시장) 너머로 조계가 확장되자 터잡이는 점차 철길 너머 동구쪽으로 밀렸다. 전후 배다리시장은 송림동, 숭의동 피난민들로 넘쳐 났고 수돗물이 부족해 한강에서 물을 끌어왔던 수도국(산) 주변은 그 당시 삶과 흔적을 잘 보여 준다. 더욱이 일제 때부터 기계, 방적공장, 정미소 등이 있던 만석동, 화수동도 매 한가지 어렵던 시절 서민 삶의 날것 그대로의 현장이었다. 복개(1990) 전 동인천역 앞 갯골은 화수부두의 수문통으로 이어졌고, 밀물 때 화평파출소 앞까지 작은배가 들어왔다. 송림초 앞에서 송림오거리로 가는 길이 확장되자 배다리시장은 자유시장(중앙시장)에 흡수됐다. 그시절 인천 모둠살이는 중앙시장, 배다리, 우각로 주변 그리고 영화학교, 창녕초등학교에 남아 전해졌다. 3.1운동의 첫 만세를 부른 창녕초등학교(인명학교-인천공립보통학교), 그 옆에 있던 의성사숙(서당)은 미학자 고유섭의 유년시절 배움터이었다. 초기의 입국자들은 선교와 교육열, 무역과 투자 흔적을 곳곳에 새겼고, 주한미국공사 알렌 별장(전도관 자리) 아래에서는 경인철도 기공식과 우각리역을 두기도 했다. 동인천과 주안역 사이 구간이 넓어 이용이 불편하자 숭의동, 도화동 주민의 편의를 위해 간이역(제물포역)을 설치(1959)했다. 강점기 일본이 주안에 염전을 만들어(1907) 성공하자 1920년대부터 남동, 소래, 군자염전은 전국 소금생산량의 60%를 담당했으며 후일 주안염전이 문을 닫자 그자리 60여 만평 신개발지에 공단이 들어섰다. 석바위(석암장)는 장이 서고 하룻밤 쉬어갈 주막도 있던 곳이라 예부터 서울가는 길목이었다. 이런 경인가로 주변에 주택과 빌딩이 들어선 것은 '인천도시개발 5개년 계획'(1965) 부터다. 중구, 동구에 집중된 도심 기능을 외곽으로 분산시키는 인구 100만 시대의 대비책이었다. 주안염전 자리의 북쪽은 공단, 남쪽 논밭은 시가지로 정비해 주안역 중심의 새 도심을 조성했다. 이때 주안사거리에 들어선 시민회관(1974)은 공연과 문화행사 뿐만이 아니라 영화도 상영했다. 시민회관 사거리의 인천5.3민주화운동과 일제강점기 부두노동자들이 발화한 한국 노동운동 또한 인천에서 비롯되었다.
"한강에서 운하를 파 주안 갯골과 연결시키면 '염하'를 거치지 않고서 배가 직접 한강으로 들어올수 있다”던 김안로(영의정 중종)의 견해는, 후일 일본이 서울에서 가깝고 철도와 항만을 갖춘 인천의 부평에 조병창을 설치한 것으로 입증된 것일까. 만석동 인천기계제작소에서 잠수정을 건조했던 사실은 비록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 육군의 고육지책(해군과의 불화)이었지만 후일 한국기계공업의 초석으로 작용했다. 한국전쟁에 맥아더 연합군은 월미도로 상륙해(9.15) 경인가로를 지나 부평과 김포를 접수한 후 서울을 수복(9.28)했다. 이때 해병대원과 함께 북성포구(레드비치)로 상륙한 마거리트 히긴스*는 이듬해 여성 최초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일본이 청.러, 중일전쟁을 위한 거점도시로 키웠던 도시 인천의 항동, 주안공단, 남동공단 일대는 모두 매립지다. 이런 바탕 아래 동서 방향으로 몸을 불리던 인천이 시청사를 구월동에 옮기며(1985) 연수구, 남동구를 잇는 남북 축으로 도시 공간을 확장했다. 그에 더해 인천경제자유구역(IFEZ)의 빛나는 성과와 서구 청라지구의 도시개발은 미래 인천의 야심찬 도약일 것이다.
비류는 미추홀* 도읍을 문학산에 두었다. 주몽을 도와 고구려를 창업했던 어머니 소서노, 온조와 함께 본토를 떠나 세운 나라였고 후일 동생 온조의 위례 매소홀*, 즉 백제에 흡수된 지금의 인천 땅이다. 지리적 조건이 해상으로 열려, 고구려 신라 사이에서 백제가 중국과 해상 무역을 중요시 했던 곳이었다. 문득 법을 찾아 당나라로 가려던 의상과 원효의 뱃길이 궁금했다. 기록에 당은포는 지금의 화성시 서신면, 바닷가가 아니었다. 거기 당(항)성 포구는 내륙으로 깊숙한 곳이며 물길을 따라 들어왔던 중국 배를 타려던 셈이고 고구려 쪽 육로가 막히자 떠올린 대안이었다. 이처럼 지리적 조건과 시대의 케미는 한때 과거 일로 그치지 않고 언제 어디서든 다시 반복된다. 일상의 무대는 여행의 일탈과 달리 삶 그 자체 이듯이, 지난 시간을 따라서 인천 구도심의 변화와 일상의 한 결을 살펴 보았다. 인구 293만 명(3위) 도시 인천, 이제 확장보다 순환을 고민할 시점이다. 어쩌면 예전의 청정한 갯골이 일상으로 돌아오는 날, 봄 기운도 찾아올 수 있을까. 마치 등잔 밑에서 찾을 반지처럼 모를 일이다.
* Maguerite Higgins(1920~66): 뉴욕 헤럴드 트리뷴 종군기자, 아일랜드계 홍콩 출생 미국인, 베트남전쟁 종군 중에 병사. 미국군함이 강화도에 쳐들어온 신미양요(1871)의 펠리체 베아토, 러일전쟁의 잭 런던 등 한국전쟁의 270여 종군기자 중 가장 빼어난 활약을 펼쳤다. <WAR IN KOREA> 출간과 더불어 국제사회에 한국을 위한 도움을 호소 함.
* 미추홀彌鄒忽: 추모왕의 축복이 두루 널리 지속될 것을 약속한 땅. / 매소홀買召忽: 소서노가 마한으로 부터 구매해 얻은 땅. (조선상고사, 신채호 _한국 도시디자인 탐사 p457)
참조 : 택리지(이중환, 을유문화사), 시간을 담은 길(배성수, 글누림), 인천 100년의 시간을 걷다(이연경 문순희 박진한, 북멘토), 조리개속의 도시 인천(전진삼, Spacetime), 한국 도시디자인 탐사(김민수, 그린비), 인천 에코뮤지엄플랜(2018 배다리 도시학교), 문학산 역사관(인천광역시 미추홀구), 탁포사람들(인천광역시), LIFE(October 2, 1950), 인천의 어제와 오늘(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kkkk8155), agust의 軍事世界(https://blog.naver.com/xqon1/222323551990)
_no.77 《와이드AR》 2021년 07-08
김재경의 PHOTOSSAY 16
날이 저물어 영도다리 아래서 배낭을 챙겼다. 생약 파는 점포 안에서 두 남자가 막걸리 병을 내려놓으며 나와 눈이 마주쳤다. 배경 선반에 말린 약재자루가 가득이 정돈되어 있어 뭔가 느낌이 왔지만 걸음은 이미 떼어논 다음. 지나치던 발걸음을 되돌려 정중히 사진촬영을 청했다. 이런 순간을 그냥 흘려보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크레타 섬에서 지중해 주변 도시국가로 번진 힘이 동쪽으로 움직였다. 그 힘 알렉산드로스의 동방정복은 인도에서 멈췄고, 아시아 극동지역에서 또 다른 힘이 솟구쳤다. 거꾸로 보면 일본이 대륙을 향한 길에 조선이 놓였고 그 길목이 부산지역인 것이 화근이었다. 선사시대 이래 교류에도 불구하고 잇단 왜구의 노략질은 조선이 동래현에 진을 설치(1397)하게 작용했다.대마도정벌(1419)로 일본과 교역을 끊거나 또 삼포(부산포, 울산 염포, 창원 제포)를 열어 두 나라 사이의 무역을 유지했다. ‘넉넉한(富山) 고장’(東萊富山浦之圖 해동제국기 1471), 이름 글자에 변화가 찾아왔다. "부산(釜山)은 동평현에 있으며, 산이 가마꼴 같아서 이렇게 이름 했고 그 아래가 부산포이니, 늘 살고 있는 왜호(倭戶)가 있으며 북쪽 현까지 거리는 12리이다.”(신증동국여지승람 1481) 자원이 넉넉했던 부산(富山)이 가마솥 모양(釜)의 산山 아래 부산포의 장소성(경제, 외교, 군사)을 강조한 부산(釜山)으로 바뀐 것이다.
한편, 일본은 도요또미 히데요시가 권력을 통일(1580)하자 힘을 국외로 돌려 조선을 침탈(1592)했다. 부산진(자성대)과 동래성을 짓밟고 한양을 접수한 후 평양에 머물던 왜군이 조명연합군에 밀린 것은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해상 보급로를 틀어 막은 채, 왜군의 교두보 부산포에 큰 타격을 입혔던 이유도 있었다. 지금의 좌천동, 문현동, 우암동 해안가에 있던 적선 백여 척을 깨부순 것이고 왜군이 웅천 등 곳곳에 성을 쌓으며 전략을 바꾸도록 했다. 이후 전선이 교착되고 정유재란으로 이어졌다. 근대기, 일본이 명치유신(1853~77) 후 대륙침략의 기회를 노려 운양호사건(1875)을 일으켰다. 부산항에 들어온 일본 군함이 남해안과 동해안 탐측, 시위 후 강화도를 무력 침입한 사건이다. 이로써 조선정부를 압박해 강화도 조약(1876)을 체결했다. 그 즈음의 부산은 "전체가 네 개의 구역으로 뚜렷이 구분된 도시”.* 즉 초량왜관의 일본인 전관거류지(1877), 동래읍성 지역, 영선산 일대의 유럽인 거주지, 조선인 토착민들이 거주하는 부산진 포구를 뜻했다. 용두산(송현산) 동편과 서편에 걸쳐 있었던 초량왜관, 조선시대 왜인 통제를 위한 구역이며 동관 3대청(관수옥, 개시대청, 재판옥)과 빈번소 등 관청 건물이 해안선을 따라 위치했다. 개항기에 일본인 거류지로 사용되었고, 일제강점기에는 식민통치의 중심지로 산 정상에 '부산신사'를 두었다. 광대한 매축공사(1902~1934)는 영선산을 깎아 얻은 흙으로 부산 앞바다의 지형을 바꿔 나갔다. 경부선 철로 부설을 위해 자성대 아래 부산포 일대를 메운 것도 그즈음. 북항 주변과 중앙동 땅이 그렇게 생겨났으며, 용두산에서 용미산(龍尾山) 자리로 옮겨 앉은 부산부청사(1936)는 해방 후 부산시청사로 사용되다가 연산동에 새청사를 신축해 옮기자 지금의 제2롯데월드가 들어섰다. 군면통폐합(1914) 때 부산부(초량, 부산진, 영도)가 동래군과 나뉘며 세운 영도다리(1934)는 이런 역사의 일부분, 옛 부산의 기원지로서 자성대와 부산포 일대에는 '가마 부’산釜山의 장소성이 깃들여 있다.
"흰 모래 푸른 솔의 해안, 종일 파도 뿐인" 삼천삼백여 명(1876)의 작은 어촌이 근대적 항구의 기능을 갖추기 시작했다. 전형적인 식민지 항구도시는 근대화 이전의 경제를 그대로 안은 채 일본 제국을 연결하는 무역항으로 발전됐다. 한국인 이만팔천, 일본인 이만오천(1910)의 도시는 경남도청이 진주에서 옮겨 오자 이십만명으로 늘지만 그 중 육만이 일본인이었다.(1936) 그리고 일제의 대동아공영권, 허망한 꿈은 패전으로 끝이 났다. 해방이 되고 인구 28만(일본인 5만명 귀국)이 오십만(1948)을 넘어서지만 상공업이 마비된 이 기간의 부산은 콩나물 시루 같았다. 그리고 전후(1955) 백만이 넘자 부산은 온통 판잣집이었다. 중부 만사백, 서부 삼천, 영도 칠백, 초량 삼천, 부산진 이천, 동래 육백 모두 합해 이만채였다. 이런 판자촌 대화재(1953)로 부산우체국, 부산역, 부산일보, 부산방송국을 포함한 공공건물과 삼천여 채의 집이 타서 없어졌고 육천세대 삼만여 명이 이재민이 되었다. 기름종이를 지붕에 덮은 목조건물이 불타고난 자리에 새건물이 들어서는 조건은 충분했다. 현대식 건물이 가득찬 지금, 부산의 옛모습을 볼 수 없어도 지층에 새겨진 원도심이 북항, 부산역, 남항, 영도지역 임에 틀림이 없다.
폭이 넓은 복도에 평상까지 놓여, 마치 한가한 동네의 골목을 닮은 영선아파트. 마늘이 담긴 양파자루와 시래기는 벽에 매달려 있고 주민들은 한담을 나눈다. 재개발이 한창인 옆 단지에 좋은 집이 많았다는 매축지마을 할머니, 얼마 전에 잃어버린 쇠종 얘기를 꺼낸다. 짐작에 외부인보다 사정을 아는 이의 소행인 듯하며 이곳 대부분의 집(외지인 소유)들은 비었다 했다. 영도다리목 생약재상에서 만나 술잔을 건네던 이의 말도 귓전을 맴 돈다. “부산의 원도심은 동래입니다.” 그는 동래사람이었고, 문화적으로 ‘상혼’이라는 말이 동래부를 우위에 두고서 혼사를 논했던 옛날식 표현이고 보면 이처럼 제 고장 사람들의 자부심을 잘 드러낸 표현도 없을 듯했다. 양피지 위에 덧쓰여진 글처럼 땅과 사람과 시간이 직조한 무늬를 따라서 초기 부산의 도시구조를 살펴 보았다.
* Charles Louis Varat(1842~1893) : 프랑스 여행가, 지리학자, 민속학자
참조 : 임진왜란(이장희.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부산포해전의 승리요인과 위상(임원빈. 이순신연구논총 제32호), 한국의 발견 부산(한창기. 뿌리깊은 나무), 한국 도시디자인 탐사(김민수. 그린비), 팬저의 국방여행(http://panzercho.egloos.com)
_no.76 《와이드AR》 2021년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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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었던 흙에서 기운이 솟아 오른다. 시내물 흐르는 소리는 동면의 개구리를 깨우고 들판은 초록 옷을 입는다. 이렇듯 생명이 움트는 힘은 무엇이며 어디서 오는가. 자연의 신비는 수수께끼나 사람의 도시는 동력이 필요하고 연소재로 물질을 태워야한다. 오래된 골목길에 다양한 상권을 지닌 도심지 구역이 변신의 과정에 있다. 반세기에 걸친 쇠퇴의 길에서 벗어나려는 탈각의 진통이다.
한성과 서울의 중추 종로거리의 성쇠는 강남시대의 부흥과 반비례하는 도시역사를 공유한다. 일제강점기 경성은 도시계획으로 시구개정사업(1912~18)을 시행했다. 조선시가지계획령(1934)에 따른 토지구획 정리사업은 도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2차 세계대전 시기 공중폭격에 대비한 ‘소개공지’를 조성했다. 폭 30~50m 긴 띠를 이루는 빈 터 소개공지는 공습 때 도시의 화재를 저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경성부(서울시)는 종로, 동대문, 회현동, 신당동, 갈월동, 충정로 일대의 6개소를 지정해 그 중 종묘앞~필동간(세운상가 지대) 1개소만 6월에 철거를 완료했다. 그 해 1945년 8월 일본이 패전했기 때문이다. “종묘 앞에서 필동, 경운동~종로의 소개도로에는 입추의 여지없이 판자집이 들어 찼으며 사창私娼의 집합처가 되었다. 1950년 대부터 68년까지 이 곳을 중심으로 종로 2가~5가 일대는 ‘종삼’ 또는 ‘서종삼’ 이라 불렸다.”(손정목) 대부분 일본인 소유지던 이곳은 전후의 곤궁한 사정 아래 천막과 루핀 지붕의 서민 판잣집이 점유했다. 한 눈에도 추레하게 보였던 이곳을 중구청이 나서서 정리를 위한 기획안을 세웠다. 대통령의 재가를 얻은 시장의 추진력은 불도저 같은 힘을 발휘했다. 한 때 국회의사당 후보지로도 논의된 바 있던 이 소개공지는 도시계획가로 ‘광로 제3호’로 이름한 도시계획으로 발전해 ‘세운상가’군을 건설했다. 현대상가아파트의 준공(1967)은 앞으로 “서울의 상가경기 중심지는 그동안 종로-명동-소공동-무교동의 순으로 이동을 거듭, 멀지않아 이 (세운)상가아파트지역으로 옮겨 갈 것으로 내다 보고 있다.”(동아일보) 그러나 연쇄상가, 백화점식상가, 아파트로 구성된 세운복합상가의 인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70년대 초로 들어서며 한강맨션의 준공과 강남개발, 신세계백화점과 미도파백화점의 약진은 서울 중심상권이 충무로-명동으로 기울게 했고 연이어 롯데백화점까지 개관하자 점차 주변부화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전자제품, 악기 전문점이 많던 이곳에 청계천, 을지로 일대의 교통난이 겹치자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설상가상 용산에 전자상가가 들어서면서 부터는 세(상의 기)운이 더욱 기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재개발사업계획에 대한 1979~87년의 첫 시도에 이어, 2004년 ‘녹색’ 개발사업, 그리고 2006년 ‘세운녹지축 조성사업’은 종묘앞 도로면에 접한 현대상가를 철거했다. 그러나 계획이 바뀌고 2009년에 보존, 존치관리구역 지정 결정 후 2014년 주민과 함께하는 상가군의 활성화로 추진 결정되었다. 2017년 재생사업을 거친 후 청년 창업·벤처기업이 입주했다. 세운상가 기술인과의 협업으로 도심 제조업 전진기지로 조성하는 단계적 기획사업이다. 2020년 서울시는 세운재정비촉진지구 내 정비구역 해제 및 연장(안)을 결정, 사업시행기간(14.3.27~19.3.26) 5년 동안 지체사유가 인정될 경우 2년 연장이 가능한 상태이다. 향후 ‘2025 서울도시재생전략계획’과 ‘2030 서울플랜’을 거치면 중심지체계가 다핵구조(광화문-세운지구-동대문)로 전환될 태세이다.
사회 초년시절 회사에서 필요한 사진용품이나 전자부품을 구하러 나오던 종로3가는 내게 익숙한 곳이다. 그새 강산이 많이 변했으나 언제 방문해도 눈에 익어 안도와 소외가 교차하는 이 일대가 쇠퇴와 변화의 길에서 엉거주춤한 모습이다. 세운상가 양편의 동네 종로3.4가 장사동 예지동 입정동 산림동 초동 인현동 을지로3.4가 충무로 일대는 골목이 잘 보전되어 다양한 업종과 상권이 형성된 곳이다. 어쩌면 타국의 여행지 오래된 가게에서 받은 인상이 좋았다면 이런 점이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선형적으로 흐르는 역사의 시간에 성공과 좌절의 기록은 그 시대 뿐만이 아니라 후대에 교훈을 주며 여기엔 개인의 기록도 편입되기 마련이다. 부침의 흔적을 읽어 지난 시기를 재구성해 미래를 그리는 점에서 역사는 우리의 선생이다. 이 즈음의 상황이 관전자의 눈에는 지난 시기 과밀한 강북의 대안으로 추진했던 강남개발의 여파를 상쇄하는 것으로 보인다. 보전과 부분적 개발은 과거와 현재의 화해다. 서로를 존중하며 공존할 수 있는 방식이다. 남은 과제는 한 쪽이 밀려나지 않도록 신의를 잃지 않는 일이다.
참조 : “아! 세운상가여! 재개발사업이라는 이름의 도시파괴”(손정목. 국토) [서울 정책아카이브] [한겨레]
_no.75 《와이드AR》 2021년 01-0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