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난곡(낙골), 신림7동 20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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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an 02, 2024

    김재경의 PHOTSSAY 29 _no.89 《와이드AR》 2023년 11-12

     

    그때 어둡고 흙 냄새나던 곳을 왜 그리 좋아 했는지… 대개 동네마다 어린이 놀이터엔 후미진 곳이 있었다. 전 후, 모두의 삶이 점차 자릴 잡아도 도시와 마을은 여전히 낡은 곳이 있었다. 그래서일까 어린 눈에, 구석진 곳은 몽상의 나래를 피우기 좋았다. “다락이 없는 집에서는 신성함이 결여 되고, 지하실이 없는 집은 거주의 원형에서 제외된 집이다”(가스통 바슐라르). 물론 그 요건이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다해서 기억할 것이 없는 건 아니다. 이제 이런 곳도 수많은 조각들을 지닌 기억의 창고로 변한다. 주변의 사소한 것에 얽힌, 그 사연들이 은신처를 삼은 집이 모여 마을을 이룬다. 억압된 일상에서 잠시라도 벗어나고 싶은 아이들, 비행을 저지르는 곳이라 제거의 대상으로만 볼 것이 아니다. 자기 존재의 사유와 상상력을 키우는 장소도 된다. 유년 시절, 아이의 경험은 점차 시간이 흐르며 기억의 원형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 상상력이 어디서 오는지 알 수없지만 대부분 유년의 기억부터라면 이는 대낮의 밝은 곳보다 어둡고 후미진 곳일지도 모른다. 비록 도시의 성장과 변화가 아이들의 놀이터를 바꿨을 지언정 저들의 무의식은 숨을 곳을 좋아하지 않던가. 벽장이나 옷장에 들어가던 버릇 말이다. 엄마의 뱃속 그곳은 집의 원형이며, 생명이 잉태된 원초적 동굴이라 그렇단다. 난곡은 2002년 도시 주거지 재개발로 사라진 도시 마을이다. 이곳은 위치상 서울의 신림7동을 이루며, 낙골이라 불리기도 했다. 쟁반같이 보이는 넓다란 산기슭에 집들이 따개비처럼 다닥다닥 달라붙어 있었다. 제법 격식을 따른 개량 기와집들이 꼭 필요한 거리만 유지한 듯했다. 뜯어보면 모두 낡고 쇠락 했지만 따스한 햇살 아래서는 평안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삶의 거소를 옮기려면, 이는 슬픈 일이기도 하다. 아파트 단지로 바뀌어버린 지금 이전에 살던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도시의 세 켜를 보여주는 사진에서 멀리 보라매공원 옆의 고층 빌딩이 보이는 곳이 도심의 업무지구, 그 아래 능선 사이로 살짝 보이는 곳이 일반적인 다세대 주택지 그리고 앞쪽이 난곡 동네이다. 여기 있던 어린이 공부방의 바깥 벽에 ‘낙골’이라는 글씨가 커다랗게 페인트로 쓰여 있었다. 재현할 수없는 시간의 무늬, 이미 삶이 다르고 되돌아갈 수 없는 곳으로 도시의 여러 마을들이 사라져 갔다.

    “일제강점기까지 도시 외곽이던 이 지역이 큰 주목을 받은 때가 1960년대. 서울 ‘무허가 주택’ 문제 해결을 위한 대책이 묘안으로 떠올랐다. 당시 서울시는 도심의 국.공유지, 사유지를  점거해 사는 이들을 서울 변두리 또는 경기도로 이주시킬 계획을 하였고, 관악구 신림동 일대를 그중 하나로 지목했다. 이에 따라 용산 해방촌, 청계천, 한강 주변, 이촌동, 대방동 등에서 철거민들이 이주해 새 삶의 터전으로 일구었다. 난곡은 이때까지 서울 남부지역 끝에 논과 밭, 숲으로 둘러싸였고 골짜기가 깊어 공동묘지로 있었다. 이주 초기에는 대부분 루핑집, 하꼬방이라 불리던 판잣집 형태이었다. 인구 밀도가 높으나 도로 사정이 매우 안 좋았다. 전기와 수도사정이 열악해 가로등이나 공동수도가 부족했다. 시에서 분양받은 8평 땅에 시작된 난곡의 정착 생활은 고달팠다. 시 당국이 산동네 입구의 하천방제나 치도공사를 벌였다. 하루 500명씩 동원해 닷새 마다 밀가루 한 부대씩 나눠주었다. 이를 통해 주민들은 일용직 건설 노동자로 일 하거나 집짓는 기술도 익혔다.” “주민과의 대립을 피하는 정부와 개발수익을 바라는 건설자본, 부동산 브로커와 복부인 모두 도시주거 문제 해결을 담당했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임의로 규정한 가치 기준에 의해 주민의 삶터를 소홀히 취급해 왔는지도 모른다.”

    참조 및 인용: [난곡아카이브: 난곡사람, 난곡 삶. 관악구] <저소득층의 형태 연구, 양윤재, 열화당> <난곡 이야기, 김영종, 청년사>

  • 영단(집)주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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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ct 15, 2023

    김재경의 PHOTSSAY 28 _no.88 《와이드AR》 2023년 09-10

     

    묻지 않는 답은 없다. 이름이 궁금했다. 쏘다니며 놀던 유년의 놀이터 가운데 그 집이 있었다. 커다란 나무 둥치가 톱에 잘려나가던 제제소, 기계소리로 가득하던 그 집은 규모가 엄청나고 구석구석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 ‘영단집’이, 조선주택영단에서 운영하던 제제소를 줄여 부르던 이름인줄 아는데까지 수 십년 시간이 흘렀다. 

    일제강점기 조선주택영단(1941)을 통해 건설된 영단주택營團住宅은 서민 주택문제 해결을 위해 지은 주택유형이다. 식민지 조선의 전시체제 아래 군수산업 노동자 수용을 위해 공급되었다. 중일전쟁(1937)의 배후 공업도시로 함흥, 흥남, 청진, 원산 등에 군수산업체 노동자 주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형태를 표준화했다. 서울 영등포지구(문래동)와 상도지구(상도동)는 단지개념이 적용됐다. 주택영단 설립에 따른 5개년 2만호 건설계획(경성 부산 대구 인천 대전 수원 군산 진해 평양 청진 함흥 원산 성진 진남포 신의주 나진 평강 사리원 겸이포)은 경성과 인천, 함경도를 병참기지로 바꾸려던 계획을 내비친다. 서울 영등포지구 문래동에 651호, 대방동 464호, 상도동 1,067호, 인천 부평구 산곡동 약1,000호, 남구 용현동 1개 단지 그리고 숭의동 3개 단지를 건설했다. 영등포지구 5개 유형의 경우 갑(20평), 을(15평)은 주로 일본인 관리나 직원을 위해, 병(10평), 정(8평), 무(6평)형은 한국인 노동자나 서민들을 위한 것이었다. 전시체제 아래 도시 건축의 화마를 피할 방편으로 목조에 시멘트 몰탈 칠을 했다. 

    조선총독부의 조선주택영단朝鮮住宅營團 창설은 일본주택영단의 영향을 받았다. 한국보다 앞선 일본 근대화에 주택공급은 주로 대가업자貸家業者들이 담당했다. 당시(1941) 오사카大阪 주택의 90%, 도쿄의 70%가 민간업자의 셋집이었다. 관동대지진(1923) 후 주택재건을 목적한 동윤회同潤會가 주택영단에 흡수될 때까지 18년 동안 겨우 1만호 서민주택 공급에 그쳤다. 따라서 폭등하는 집값 영향이 물가상승을 선도하자 일본 정부는 일본주택영단(1941)을 창설했다. 해방 후 조선주택영단은 주택난 해소 차원의 가치를 인정받아 미군정 감독 아래 존속하였다. 그러나 신규 주택 건설은 미미했다. 일본인 토요타가 건설한 충정(유림)아파트(1930)와 해방 이후에 건설된 종암아파트(1958)는 상징성을 띤다. 해방 전후와 전쟁 이후 태부족한 주택상황에 대한 이야기의 시작점이 된다. 무리하게 추진하던 주택공급 정책의 실패는 와우아파트 붕괴 참사(1970)와 광주대단지 주민 소요사태(1971)로 나타났다. 이에 정책을 바꿔 ‘주택건설촉진법’(1972)을 만들고 ’특정지구 개발촉진법’(1973)이 주택건설과 토지거래 세금을 3년간 면제했다. 대형 민간건설업체들의 참여를 유도한 조처이었다. 정부는 한강변 반포에서 제3한강교까지 70여 만평과 압구정동, 동부이촌동 일대 지역에 서울시가 건축허가를 내지 않도록 했다. 그리고 이곳을 아파트지구로 신설, 운용해 1979년까지 14곳으로 확대해 나갔다. 일상생활공간 물리적 범위를 근린주구 단위로 규격화해 이후 대단위 주택지 모델로 고착된다. 단지중심 공간구성과 편의시설 배분으로 인해 아파트단지의 폐쇄성을 야기한 첫 사례로 기록된다. 한편 이런 근린주구 폐쇄성을 극복한 상계신시가지는 중대형 평형없이 시민들의 차별적 요소를 줄인 사례로 기록된다. 한강변 일대가 아파트 중심의 신중간층 거주지로 탈바꿈했다. 1970년 대 신중간층의 증가와 아파트 공급 확대는 상당한 연관성을 띤다. 분양 평수를 늘리고 자재 고급화가 뒤따르며 단지계획시 주변환경과의 정합성보다 단지 내부공간구성에 집중하는 풍조를 낳았다. 그 결과 자족적 배타적인 단지계획방식의 일반화는 서민아파트와 차별화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60년 대말의 고조된 남북간 긴장상황과 사회적 불안요소에도 불구하고 아파트는 중산층이 선호하는 주택형식이 되었다. 

    한국의 첫 공공주택 공급기관으로서 조선주택영단은 대한민국정부 수립과 함께 대한주택영단(1948)으로 개칭되었다. 이후 대한주택공사법에 의거하여 대한주택공사(1962)로 바뀌고, 국영기업체 대한주택공사는大韓住宅公社 1987년까지 주택을 44만 5,477호 건설했다. 1962년 서울 마포아파트를 비롯하여, 고층아파트(한남외인아파트·남산외인아파트), 맨션아파트(한강맨션아파트·한강외인아파트, 반포아파트·잠실아파트·둔촌아파트), 광명시의 철산아파트, 경기도 과천신도시, 서울 개포아파트·고덕아파트단지, 군포 산본아파트단지, 부천 중동아파트단지, 상계 신시가지와 광명하안지구 등이다. 영구임대주택 14만호(1989~92), 근로자주택 13만호(1991~98). 서울 을지로지구의 도심개발사업(1988~1997) 등을 시행했다. 이후 한국토지공사와 통합(2009)된 한국토지주택공사(LH)는 토지의 취득 개발 비축 공급, 도시의 개발 정비, 주택의 건설 공급 관리 업무를 수행함으로써 국민주거생활 향상과 국토의 효율적인 이용을 도모해 국민경제의 발전에 이바지 함을 목적으로 한다. 최근 국토부의 정책이 연일 세간의 화제다. 국정에 사적 이해가 겹치는 순간 그 정책은 실패의 길로 들어선다. 관은 공공의 이해에 부합하는 정책을 실행해야 한다. 정책의 적실성과 투명성이 흐려지는 순간 신뢰는 땅에 떨어지고 만다.

    참조 및 인용: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도시주택으로서의 아파트, 그리고 아파트 단지 공화국의 탄생 과정, 박철수, 서울 주거변화 100년, 대림산업>

  • 삼일(청계)고가도로 해체(20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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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ct 15, 2023

    김재경의 PHOTSSAY 27 _no.87 《와이드AR》 2023년 07-08

     

    "크고 작은 개천에 토사가 쌓이고 막히는 이유는 오로지 .. 관리하지 않고 .. 그것을 준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준천사실濬川事實 1764) 조선왕조가 도성을 건설할 때 '개천'은 가로 구조를 형성하는 기반으로 작용했다. 한반도 지형 구조와 달리 한양은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다. 서북쪽에 위치한 인왕산, 북악산, 낙산과 남산 기슭에서 물이 모여 동측으로 흐른다. 개천의 발원지는 인왕산 백운동천과 북악산에서 내려오는 삼청동천이다. 게다가 지천이 대개 남북 방향에서 모여드니 대로와 소로가 격자 형태로 발전하게 됐다. 초기 한양의 도시구조를 얽은 태종(1411)은 개천이 자주 범람하자 '개천도감開川都監'을 설치하고 연인원 5만 2,800명의 역부를 동원해 대규모 공사를 했다. 이후 세종은 보수와 확장을 10여 년 동안 계속했다. 백성을 아끼는 마음에 농한기 인력 만을 동원했다. 공사 후 마전교 옆에 개천 수위를 측정하는 '수표석水標石'(1441)을 세웠다. 그러나 이때부터 300여 년간 방치된 개천이 문제가 되었다. 도성 인구가 급증(1657년 80,572명~1669년 194,000명)하자 개천의 하상이 높아졌다. 토사가 쌓이는 원인은 벌목과 개간이다. 홍수기 유입되는 토사와 생활 오수로 개천의 하상이 교량 상판과 맞닿을 지경이었다. 영조는 고민 끝에 결단을 내렸다. 준천 후에 얻을 실효성이 역부(지방민, 도성거주인) 동원의 필요보다 크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결과이었다. 이에 '준천사濬川司'를 설치하고 57일간 연인원 20만 명을 동원해 대대적으로 개천을 준설(1760)했다. 그리고 이때 새 수표교 돌기둥에 '경진지평庚辰地平' 네 글자를 새겨 향후 개천 준설의 표준을 삼도록 했다. 

    일제강점기 '개천開川'이라 불리던 이름이 '청계천淸溪川'으로 바뀌었다. 조선의 궁궐과 관아, 시전 등이 주로 도성 내 북측에 자리 잡은 반면 일본인과 청국인들의 주거지는 청계천 남측으로 제한되었다. 이는 북촌 진출이 여의치않던 점이 역으로 표출됐다. 경성부는 청계천을 경계로 북쪽과 남쪽을 차별화하는 정책을 펼쳤다. 도시기반시설 정비재원을 남촌(일본인 거류지)에 집중했다. 청계천을 복개 해 택지를 조성(1926)한다거나, 도로를 만들고 그 위에 고가 철도를 부설하는 계획(1935)을 발표했다. 자동차 전용도로 안(1939), 또는 지상에 전차가 다니며 밑으로 지하철을 운행하는 계획(1940)도 발표했다. 모두 만주사변과 중일, 태평양전쟁을 치루는 동시에 경성을 대륙의 병참도시(대경성계획)로 바꾸려던 계획 중 하나(시가지계획 1934)였다. 해방 후 청계천 준설 계획은 전쟁으로 실행되지 못했다. 그동안 황폐해진 청계천 보수가 시급한 일이 되었다. 서울 인구가 피난민들로 인해 급증했고,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천변에 판자촌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쓰레기와 오폐수가 넘쳐나 더이상 방치할 수 없었다. 3공화국 체제 아래 서울 시장의 추진력에 불이 붙었다. 청계천 복개 공사(1958-66)가 시작됐다. 당시의 공사비는 16억 6,170만 환. 복개 된 도로 위에는 고가도로를 건설했다. 광교에서 마장동까지 총길이 5,650미터, 폭 16미터의 고가도로를 완공(1967-1971)했다. 한편 세운상가 도심재개발사업(1966-68)은 '광로 제3호(소개공지疎開空地)'를 폐지한 후 그 자리에 추진 됐는데 아세아상가 기공식(1966)이 첫삽이었다. 고가도로와 세운상가 건립은 청계천 복개와 동시에 추진됐다. 최종 신설동~마장동철교 구간 공사(1977)가 끝나자 전체 복개공사는 종료됐다. 그리고 또다시 복원 공사를 위해 청계고가와 복개 도로를 철거(2003.7-9월)하고 청계천의 물길과 주변을 복원했다. 그러나 애초에 복원 기준점이 불분명해, 완전하지 않은 공사일 수밖에 없었다. 전체 공사(2003.7.1-2005.9.10)에 연인원 69만 4천 명과 3,867억원의 예산이 투입됐다. 

    그때 청계천 복원은 하나의 '사건 소식'처럼 들렸다. 그리고 사람들의 기대와 우려는 정치권의 큰소리 앞에 작아졌다. 지난 60년 대의 일처리 방식이 돌아왔다. 시간 앞에서, 겨우 30년만에 도시 구조물이 사라진 사실 앞에 투사된 인간 의지의 덧없음 또한 연기처럼 사라졌다. 어쩌면 우리는 겉모습에 취해 사는지 모를 일이다. 사물은 눈과 오감을 통해서 기억으로 옮겨가고 존재는 흐릿해 진다. 빛의 자국으로써 사진이 사물 이미지를 강화하고 보전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과거 "복개된 청계천은 더 이상 차별의 경계선으로 기능하지 않았다. 분열과 분할은 식민 지배의 직접적 결과였지만, 식민 지배의 종결과 함께 끝나지 않았다. 다만 그 상징성은 한강에 넘겨졌다. 강남이 대규모로 개발되며 남촌과 북촌의 시대가 가고, 그 대신 강남과 강북의 시대가 열렸다."(전우용, 역사 속의 청계전과 그 이미지) "청계천로는 대조적인 도시조직의 콜라주다. 자연의 미세한 변화를 드러내는 ‘물길'과 인위적인 '고가도로'는 도시적 스케일을 드러내고 있다."(송인호, 청계천로의 도시조직) 그리고 청계천이 '인공하천'으로 돌아온 지 20년 되었다. "이푸 투안(Yi FuTuan)의 '토지애土地愛(Topophilia)'는 땅과 몸을 동일시하는 현상이다. 농부나 어부가 땅과 바다를 생의 터전으로 여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도시의 어느 곳에 삶의 뿌리가 묶여 있는 사람들이 있다."(진양교, 청계천의 황학동) 이들은 자기 삶의 근거와 터전을 떠나 살기 어렵다. 지금 시대는 유목의 삶을 살아야 한다지만 이와 다른 정주의 삶도 함께 펼쳐야 한다. 시간과 역사의 흔적을 지닌 장소는 영혼의 집이다. 도시의 활력과 지속 가능성이 거기서 비롯되는지도 모를 일이다. 

    참조: <청계천에서 역사와 정치를 본다, 조광권, 여성신문사>, <청계천, 청계고가를 기억하며, 서울학연구소, 마티>, <도올의 청계천 이야기, 김용옥, 통나무> [한겨레] [쿠키뉴스]  

  • 한국 아파트 문화의 사회현상과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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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ct 15, 2023

    김재경의 PHOTSSAY 26 _no.86 《와이드AR》 2023년 05-06

     

    _ 욕망이 투영된 한국 아파트 문화의 사회현상과 전망.

    _ 한국의 아파트 문화는 급속한 도시화와 경제 발전의 결과로 등장한 사회 현상이다. 도심에 위치한 현대식 고층 아파트에 대한 소유욕이 강한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열망은 전국에 수많은 아파트를 짓게 했고, 많은 한국인들에게 성공과 지위의 상징이 되었다. 한국 아파트 문화의 핵심 동인 중 하나는 경쟁이 치열하고 지위 의식이 강한 사회성의 반영이다. 바람직한 위치에 현대적인 아파트를 소유하는 것은 성공과 성취의 상징으로 간주되고 종종 사회적 사다리를 오르는 방법으로 작용했다. 그 결과 많은 한국인들이 아파트를 구입하고 유지하는 데 상당한 돈과 노력을 투자할 의향을 드러낸다. 아파트 문화도 정부의 도시화와 현대화 추진에 힘입은 바 있다. 전후 시대에 정부는 증가하는 도시 인구를 위한 저렴한 주택을 제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아파트 건설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아파트 문화는 생활환경 개선, 경제성장 등 한국 사회에 많은 혜택을 주었지만 단점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현대식 아파트 소유에 대한 강조는 집을 유지하는 비용을 따라잡기 위해 고군 분투하는 많은 한국인들에게 높은 수준의 부채와 재정적 스트레스로 이어졌다. 또한 도시 개발에 대한 집중으로 인해 많은 전통적인 이웃과 문화적 명소가 파괴되어 국가의 문화 유산이 침식되었다. 오늘날 아파트 단지는 계속해서 한국의 도시 개발 및 계획의 주요 초점이 되고 있다. 미래를 내다보면 한국의 아파트 문화는 변화하는 사회경제적 여건에 맞춰 계속 진화하고 적응해 나갈 가능성이 높다. 국가의 고령화 인구와 변화하는 인구 통계에 따라 고령자 친화적인 아파트 또는 공동 주택 커뮤니티와 같은 보다 다양하고 유연한 주택 옵션으로 전환할 수 있다. 향후 아파트 건설 및 개발에서 지속 가능성과 환경적 책임이 더 강조될 수 있다. 

     

    _ 이런 점에서 사회적 욕망은 정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_ 사회적 욕망은 한국 아파트 문화와 관련된 정치적 결정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더 나은 생활 조건, 지위 및 보안에 대한 욕구는 고급 아파트 및 관련 인프라 개발을 지원하는 정부 정책에 대한 요구를 생성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개발자에게 더 고급스럽고 친환경적인 아파트를 짓도록 세금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정부 정책은 그러한 주택에 살고 싶어하는 주민들의 욕구에 부합할 수 있다. 이러한 정책은 경제 성장을 촉진하고 일자리를 창출해 정부 수입을 증가시킬 수 있다. 마찬가지로 공동체 의식과 공유 정체성에 대한 사회적 욕구는 공공 공간 및 커뮤니티 시설과 관련된 정부 정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예를 들어, 정부는 아파트 주민들의 공동체 의식을 함양하기 위해 공공 공원, 커뮤니티 센터 및 문화 시설 개발에 투자할 수 있다. 한편, 사회적 욕구는 정책 입안자에게 도전 과제를 안겨줄 수도 있다. 고급 아파트에 대한 욕구는 주택 가격 상승과 사회적 불평등에 기여할 수 있으며 이를 해결하려면 정부 개입이 필요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친환경 아파트에 대한 수요는 지속 가능한 건축 관행을 촉진하기 위한 정부 규제와 인센티브를 요구할 수 있다. 또한 사회적 욕구는 정치적 결정이 이루어지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정책 입안자가 특정 문제를 우선시 하도록 압력을 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고급 아파트에 대한 대중의 수요가 높다면 정책 입안자는 환경적 지속 가능성과 같은 다른 문제가 중요하더라도 그러한 주택 개발을 지원하는 정책에 더 많은 자원을 할당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사회적 욕구는 한국 아파트 문화와 관련된 정치에 상당한 영향을 미쳐 정부 정책 및 의사결정 과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따라서 정책 입안자는 경제 성장, 사회적 평등, 환경적 지속 가능성과 같은 다른 고려 사항의 균형을 맞추는 동시에 유권자의 욕구를 고려해야 한다.

     

    _ 그렇다면 지금 한국이 겪고 있는 정치적 보수주의의 뿌리가 아파트 문화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에 동의할 수 있을까?

    _ 한국의 정치적 보수주의의 뿌리가 오로지 아파트 문화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일 것이다. 아파트 문화는 의심할 여지 없이 한국 사회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한국의 정치적 보수주의는 역사적 유산, 경제적 상황, 사회적 가치, 지정학적 현실 등 복합적인 요인의 영향을 받는다. 즉, 아파트 문화와 관련된 지위와 안전에 대한 욕구는 정치적 보수주의에 기여할 수 있다. 고급 아파트에 대한 열망과 그들이 대표하는 라이프스타일은 일부 개인들로 하여금 개인주의, 능력주의, 자유 시장 자본주의와 같은 보수적인 정치적 가치를 더욱 강하게 동일시하도록 이끌 수 있다. 또한 안보와 안정에 대한 열망은 일부 사람들이 법과 질서, 국방, 전통적인 사회적 가치를 우선시하는 보수적 정책을 지지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의 정치적 보수주의는 다양한 기원과 동기를 가진 다면적인 현상이라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파트 문화가 한 몫을 할 수는 있겠지만, 보수주의를 이러한 문화적 경향에만 귀속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 대신, 이 현상을 완전히 이해하려면 한국의 보수주의에 기여하는 복잡한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요인에 대한 보다 미묘한 이해가 필요하다. 

     

    답글 : CahtGPT-4

    질문자 : 최근 오픈에이아이(Open AI)가 개발한 대화 전문 인공지능 챗봇이 화제다. 2가지 의도적인 질문을 해 보았다. 첫째 이미지 검색을  통해서 벽에 그린 그림에 대한 이해를 기대했으나 화가 정보 또는 기사 정보만 제공했다. 둘째 좀더 정치적 편향성을 띄는 주제를 물었지만 더이상 답을 하지 않았다. 경구와 토씨 일부는 교정 함.)

  • 새석관시장아파트(2018년), 성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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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ct 15, 2023

    김재경의 PHOTOSSAY 25 _no.85 《와이드AR》 2023년 01-02

     

    한세기 동안의 지난 시간에 겪은 한국의 지리적 변화는 그 이전의 오랜 세월보다 많은 흔적을 남겼다. 6.25전쟁 이후의 도시지리적 변형을 제3공화국이 주도해 정치가 제도를, 법과 행정은 도시의 구조를 만들고 그 테두리 안에서 우리의 근과거의 삶이 펼쳐졌다. 산업과 개발의 붐이 노동력의 폭발적 수요를 만들고 이에 따른 성과의 그늘은 도시주택공급의 한켠에서 부실공사를 초래했다. 건설 현장에서 벌어진 충격적인 인명사고의 여파는 관에서 주도하던 주택공급 방식이 민간주도로 바뀌는 계기가 되었고, 이 과정에서 강남이 대규모 신도시로 개발되었으며 강북 곳곳에도 민영아파트 단지들이 연이어 세워졌다. 그 사이 도심지의 재래시장도 주거와 결합해 상가시장아파트란 이름처럼 주상복합의 원형으로 자릴 잡았다. 그러나 시대의 속도가 빠른 만큼 변화의 속도에서 뒤지자 점차 사람들의 발길은 다른 곳으로 옮아갔다. 지금보다 건축 재료가 좋을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유지관리 비용의 순환구조가 지속성을 잃으면 건물이 쇠락하는 것은 시간 문제이기 때문이다.

    “상가아파트는 1960년대 서울의 급격한 도시화로 인한 주택부족난 등의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도심내의 상업지역이나 간선도로변을 중심으로 건설했던 복합주거유형으로 아래층에 상가를 위쪽에는 아파트형 주거를 결합한 형태이다. 주로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에 거쳐 많이 지어지다가 그 이후에는 거의 지어지지 않았다. 성북의 상가아파트도 서울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6~70년대에 걸쳐 집중 건설되었다. 새석관시장아파트, 삼선상가아파트, 성북상가아파트, 장석상가아파트, 풍교상가아파트 등이 지어졌으나 이제 심각하게 낡아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거나 이미 재개발되어 사라졌다. 1971년 도로조차 제대로 정비되지 않았던 석관동에 자리 잡았던 새석관시장, 1층은 중정형의 시장이고, 2~3층은 상가아파트로 당시에는 주변에서 가장 높은 신식 건물이었다 한다. 1층에 자리한 새석관시장은 10년 정도의 호황기를 누리다가 점차 쇠퇴하자 시장의 기능을 상실했다.”

    사진을 찍던 해에도 길가에 면해 있는 점포와 달리 채소나 과일 등을 팔았던 내부의 시장은 이미 기능을 잃어 방치된 채 너저분한 상태이었다. 2층 아파트의 중앙 복도는 한낮에도 어둡고, 작은 규모의 각 세대는 평면도 일정치 않아 보였다. 3층 복도는 두세 곳 옥상으로 구멍을 낸 것이 환기와 채광에 도움을 주기 위한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2층 일부에 봉제 공장이 넓은 공간을 사용했고 지하층은 제법 규모가 큰 날염 공장이 기계를 돌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장은 사람이 많이 찾아와야 하는 곳 이건만 상황은 닥친 사정을 그대로 말해주고 있었다. 현실의 이해와 바램이 저마다 같을 수 없고 그 때까지의 처지를 보면 또 그만한 사유를 짐작해 볼 수 있을 뿐이었으며 그렇게 건물도 사람처럼 늙어 있었다. 이처럼 시간 앞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이 자연의 현상이라면 그 속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모든 새것은 존재할 수 없다. 도시의 확장에 따라 나타난 상가아파트 또한 시대변화의 길에서 쇠락할 수밖에 없는데, 그동안의 도시주거지 정비가 대규모로 이루어져 삶의 정황이 우리의 곁에서 떠난 것처럼 이곳을 이용했던 주민들의 소소한 이야기도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이런 형태의 시장들은 단일한 건물이어서 언젠가 여건이 되면 또다시 나타날지 모르지만 기록되면 자료가 될 수 있다.

    사진이 현실에 개입하는 일은 사실을 기록하는 일부터 사건 현장의 사태를 보도하거나 또 순수 예술로 정신을 고양 시키기도 한다. 각기 역할이 다르지만 공통점은 세계를 사진으로 담아내는 것이 그 자신의 임무인 듯하다. 새석관시장의 그 때 모습이 사진으로 남아, 누구든 자료를 찾은 이에게 필요한 이야기와 말을 거는 상상을 해보았다. 세계를 돌며 여행지의 잘 보전된 전통을 찾는 일도, 가까운 이웃을 돌아보는 일도, 아니 그게 무엇이든 기록된 자료는 쓰임새가 있다. 지금까지 사진이 건축과 도시를 배우며 많은 건물과 마을도 함께 보았다. 한 때의 존재와 부재를 증명하는 사진기록, 모두를 초대하는 열린 세계이다.

    참조 및 인용: 성북도큐멘타 V_성북예술창작터 자료

  • 하월곡동 산2번지. 밤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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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an 02, 2023

    김재경의 PHOTSSAY 24

     

    옛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다. 웃자란 나무가 시야를 가리고 예전의 산동네는 아파트 단지로 바뀌어 있었다! 월곡역 3번 출구로 나와 20여 년만에 동덕여대를 끼고 오르막길로 접어들자 기대감은 낙담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남은 기억에 의하면 그땐 의연하고 완강한 동네가 산자락을 따라 장관을 연출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몇몇 빈집은 이미 떠난이를 또 장차 바뀔 풍경을 예고 했지만 사람의 동네는 출렁이는 인생의 무대처럼 삶의 기쁨과 슬픔도 여지없이 드러내는 것 같았다. 밤골(밤가시)이 하월곡동 배후의 주거지로 자리한 것은 1960년대 들어서였다. 도심개발로 동대문, 청계천 등지에서 흘러들어온 이주민들이 정착한 곳이다. 전체 3000여 건물 가운데 900여 동이 무허가 건물인, 그마저 지은 지 20년 이상된 건물들 태반이 낡고 또 도로 등 기반시설이 빈약해 주거환경이 열악했다. 이에 성북구는 3단계 개발계획(2000)을 세우고 1단계로 ‘월곡구역’에 대한 재개발사업을 시작했다. 2004년에 입주한 세대가 2655가구, 이어서 2단계 사업으로 ‘월곡 제3구역’에 아파트 27개동 1660가구가 입주했다.(2006) 그리고 3단계 월곡 제3구역과 제1구역의 경우 녹지공간(40%)이 확보됐다. 그 결과 지하철(월곡역)이 가까운 인근의 초등학교와 사회복지관, 중고교 및 대학 등은 교통과 주거환경이 매우 좋아졌다. 

    1999년, 우리 사회는 21세기 새천년 맞이에 겨를이 없어 기왕의 낡은 주거지가 눈에 띨 수 없었겠지만 그래도 닥칠 시간은 사태를 예고하기 충분했다. 이윽고 의욕이 넘쳐나던 새 시장의 대대적인 뉴타운정책 아래 서울시는 대부분의 주거지를 재편하기 시작했다. 최대 500여 곳의 재개발 대상지가 서울 전역에 펼쳐져 있었고, 당시 부동산중계사무소에서 보던 지도에는 재개발 예정지가 곳곳에 걸쳐 자세히 표시되어 있었다. 큰길에 면한 상가건물 뒤편 배후의 낙후한 주거지는 모두 아파트 단지를 조성한다는 계획이었다. 가위로 오려낸 듯이 정교하게 표시했는데, 미루어보면 일정부분에 걸쳐 재개발 대상에 포함될 건가 하는 결정은 개별 건축주의 동의 아래 추진했을 것이다. 예컨대 아현동의 경우 건축가 김헌의 ‘스푸마토’는 사라지고, 건축가 권문성의 ‘현암사’는 살아 남는 식이다. 이렇게 비교적 새건물이라 할 건축가의 작품(?)도 재개발 의지 앞에선 속수무책이었다.

    서울은 젊다. 좀더 자세히는 도시가 젊어졌다는 표현이 맞을테다. 기왕의 낡은 주거지 대부분이 아파트단지로 바뀌었으니 이 도시의 나이에 비해 걸맞지않아 보인다. 도시의 구성체를 한 둘 꼽아서 될 수는 없지만 사물과 시민으로 대별해 보면 이 둘의 관계가 맺은 시간, 곧 역사적 구성물이 전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 일상 서민의 삶이 자리한 집과 동네, 주거지의 생활방식 등은 곧 그 도시의 특성이 된다. 지루한 삶으로부터 여행이 일상의 탈출이고 거기서 받는 인상을 도시의 특성으로 좁혀 말하면 도시의 구조와 건물과 사람이 남는다. 유무형의 도시적 자산은 그 도시의 잠재력이다. 그래서 유럽의 도시적 전통과 유산 앞에서 고개를 떨구지만 아시안 국가들의 도시적 활기는 또다른 매력으로 다가온다. 미국은 어떤가. 250여 년의 근세기 역사가 전부 임에도 도시와 산업적 유산은 우리와 비교할 수없다. 이런 점에서 도시 서울이 추구하는 모습은 또 어떤가. 많은 일을 동시적으로 추진해야만 했던 저간의 사정도 있었지만 이제는 도시의 흔적을 지우는 개발을 멈춰야 한다. 이런일이 계속될 경우 아시안 국가로서 한국이 점점 인구가 줄어들고 있는 마당에 도시의 활기조차 기대하기 어려울 수 있다. 담장을 둘러치고 블럭화 된 아파트단지들이 많을수록 그 지역의 활동이 둔해 질 것이기 때문이다. 작은 집과 건물들이 모인, 제각기 허물고 짓기를 무한 반복하는 도시는 살아있는 도시다. 문화는 다양함 속에서 꽃을 피운다. 우리의 가치관이 아파트에 매몰된 삶으로 계속될 경우 그 영향은 사회에 그대로 반영된다. 경제력과 문화는 사람이 중심이다. 아파트단지로 잠식되는 도시의 미래보다 다채로운 삶이 가능한 미래를 바래본다.

    참조: [세계일보]

    _no.84 《와이드AR》 2022년 11-12

  • 2001년의 선유도정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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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an 02, 2023

    김재경의 PHOTSSAY 23

     

    디지털 세계는 언제나 새것의 세계이다. 이 세계의 SNS 정보와 의견은 호기심을 주는 대상이다. 이미지는 표면에서 반짝인 다음 이면으로 사라지고 자신을 부르는 신호가 잡힐 때까지 긴잠에 빠져 든다. 간혹 호출로 깨어나 현재로 불려온 지난 시공간 속에서 과거의 사진(디지털)은 기쁨을 주거나 의문을 던지기도 한다. 사진의 흐름에서 양차대전과 냉전시대를 통해 형성된 현실의 눈은 일상에 가 닿았고 또 현대사진의 가교로서 도시의 인공적 풍경과 정경이 사진으로 남았다. 시대가 사람들 인식에 미친 영향이 반영되기 때문이다. 반면에 사진 사조의 발전 아래 주류 미술시장에서 현대사진의 위상을 보면 관심의 크기를 볼 수 있는데 천문학적 거래가 뿐만아니라 이미 사진이미지는 생활세계에 넘치고 넘친다. 매순간 핸드폰 영상으로 찍히고 소비되고 축적되는 사태는 현실 그 자체의 구성물로 자리 매김했다. 그 가운데 필름의 귀환처럼 보이는 현상, 즉 필름을 스캔해 디지털로 소통하는 새로운 감성을 보면 이런 디지털 필름사진이 아날로그에 대한 향수로 작용해 인스타나 트윗이 붐비는 것일까. 그도 아니라면 돌아갈 수는 없는 그 때의 감성이 다시 온 것인가 생각해 보았다. 핸드폰 카메라와 더불어 이미지 처리 성능이 강화되자 다양한 메뉴 중 선택할 수 있게 되었어도 직접 필름에 찍은 사진의 느낌을 선호하는 듯하다. 그러나 현실을 떠내는 도구로써 기계시대의 사진기는 감각의 화석이 된다해도 디지털 위세는 폭주의 궤도 위를 멈추기 어려울 것이다. 이렇게 물질이 코드로 전환된 사진세계는 오히려 현실과 비 현실의 경계를 초월해 지각을 흔들어 깨우는 각성의 기제로 작용할 수 있으나 그 끝모를 가능성이 어디까지 또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간 시대가 다시올 수 있다면 그조차 코드의 변형(실제와 가상이 뛰바뀐 세계)이든, 아니면 현실의 공간이 휘어져야만할 텐데 지난시대는 다시오지 않을 것이며 기계의 감각을 유지하는 것조차 미망으로 남을 것이다.  

    ‘신선이 노니는 곳’으로 불리던 선유봉은 한강의 아름다운 정취와 서울의 산자락을 바라보던 곳이었습니다. 예로부터 양화나루와 강 건너 망원정, 마포 잠두봉을 잇는 한강의 절경으로서, 조선시대 중국 사신들 사이에 “조선에 가서 양천현(양천구 일대)을 보지 못했다면 조선을 보았다고 말하지 말라” 했을 만큼 한강 일대의 빼어난 풍광을 지닌 곳이었습니다. 그 봉우리를 허물어 메운 선유도(1920년대)에 수돗물 공급시설인 정수장(1978)이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그 기능을 마치자 도시민 휴식을 위한 공원을 만들려 공사중(2001)이었습니다. 이미 신선이 떠나간(?) 자리에서 그 아우라의 자취는 하나도 없었고 오로지 건너편에 보이는 풍광을 바라보며 옛 시절을 가늠하는 정도 이상의 생각은 접었습니다. 이상과 동떨어진 간극 만큼이나 현실이 눈 앞을 차지했기 때문이죠. 다만 흑백사진의 톤으로 추상의 세계를 현시할 수 있도록 조절했습니다. 촬영에서 시간(-2)을 당기고 필름 현상에서 미(+3)는 적극적인 수단을 취했습니다. 공사 중의 현실보다 향후 완성된 공원에서 떠올릴 수 있을 법한 이상향을 그렸다 할 수 있겠으나 이는 하나의 몸짓일 뿐입니다. 

    시각자료 중심인 매체 인터넷은 세계를 손에 잡힐듯이 보여 준다. 즉각적이고 간편해서 마치 세계가 손가락 끝에 달려있는 착시를 형성한다. 인터넷이 최적화한 정보의 세계에서 가벼운 이미지를 탓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물질의 세계에 속한 인간의 몸으로 날고자 한다면 날개가 필요하고 그조차 가능하려면 새가 아닌 이상 어려운게 사실이다. 그래서 정신의 승리를 위해, 건물이 몸이고 건축이 새라면 모든 건축가는 날으는 꿈을 깰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종교적 초월과 해탈을 통해서라도 인간은 제각각의 수단으로 날기를 도모하는 것일테다. 하지만 바닥을 두드려 지붕을 세우고 별을 보려는 건축은 몸을 떠나 존속할 수 없는 숙명 또한 지녔다. 그만큼 영혼을 키우고 지키기 어려운 순간들로 가득찬 현실은 넘기 어려운 벽이 된다. 소설 ‘파운틴헤드’는 법정에서 하워드 로크가 자신을 변론하며 무죄를 주장했다. 이는 학생으로서 대학의 퇴교 조치에 “나는 내 기준을 내손으로 만들겠다.”는 결심에 따른 일이었다. 집산주의에 맞서 개인의 고결성을 지키려던 일이었고 이는 개인주의적 위험 요소를 떠나서 뜻하는 바가 적지 않다. 세운 뜻을 위해 돌이키는 용기. 지금 여기의 삶은 순간마다 선택적으로 흐르고, 빠른 속도 위에서는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인터넷은 우리의 시간 감각을 마비시킨다. 그렇게 우리 망막에 호소하는 이미지들의 향연에 취해있는 동안 덧없는 시간 또한 흘러 간다. 후설의 말에 따르면 “우리의 의식은 반성의 주체와 대상 사이를 오가며 흐르는데, 이 ‘시간의 근원’을 의식하지 않는 한 그 존재를 느낄 수 없다.” 밖을 보니 꽃이 진다. 

    참조: (선유도공원화사업 1999~2002, 조성룡.정영선, 서울특별시 한강사업기획단)”, (마천루1.2, 아인 랜드, 도서출판 광장), (20세기 건축의 모험, 이건섭, 수류산방.중심), (살아 있는 시간, 이종건, 궁리)

    _no.83 《와이드AR》 2022년 09-10

  • 당대에 사용이 늦어도 좋을 미래의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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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an 02, 2023

    김재경의 PHOTSSAY 22

     

    구한말 이래 대한민국 역대 정부조차 가까이할 수 없었던 땅이 120여 년만에 돌아온다. 강점기 일제가 붙인 이름이 적지 않은데 이땅도 그 중에 하나이다. 구한말 개화파와 수구파, 신식군대(별기군)에 비해 처우가 형편없던 구식군대(무위영, 장어영)의 폭동은 임오군란(1882)이 된다. 이에 일본 세력의 확대를 견제하려 청국은 군대를 끌고 들어와 용산(남단, 둔지미) 일대에 주둔했다. 이후 대륙 진출의 야욕을 품은 일본이 러일전쟁(1905) 직후부터 이곳을 영구적인 주둔지로 구축해 나갔다. 조선주차군 78, 79보병연대 주둔을 시작으로 확장을 거듭해 이른바 ‘용산군영지’는 장차 대륙으로 가는 기차역의 시발점이 된다. 철로가 부설되고 관사를 짓고 학교, 병원 등 부대시설을 갖추며 계획 도시를 구축했다. 부산에서 출발한 기차는 철도도시 용산역에 정차한 후 경의선을 달려 만주로 대륙으로 이어지도록 했고 전쟁 물자 수송의 발판을 꾸렸다. 일제가 패망하자 보병79연대 자리에는 육군본부(1958~89)가 들어왔고, 나중에 계룡대(논산)로 빠져 나가자 그 자리에 전쟁기념관이 들어섰다(1994). 해방 직후 주한미군사고문단이 잠시 사용했던 용산기지가 대한민국 정부의 공여절차(1952)를 거쳐 미군이 다시 사용하게 된 것은 6.25전쟁이 끝나고 난 뒤부터다. 나중에 일부 미군골프장 일대가 반환되자 용산가족공원(1992)과 국립중앙박물관(2005)이 들어섰다. 그리고 한국과 미국정부 사이에 ‘용산기지 반환협정’(2004)을 체결하고 대대적인 반환을 추진했다. 이에 한국 정부는 여의도 면적 5배에 달하는 ‘평택미군기지’(2017년 이전 완료)를 조성해 대체했다. 그러나 ‘용산공원조성특별법’(2009) 아래 민간의 사용을 앞두고 이 땅의 오염토 정화 비용처리 문제는 한미간 미제로 남아있다.

    쾌청한 여름날, 길 옆에 나란히 놓인 부스는 제각각 놀거리와 먹거리로 방문자의 흥을 돋우었다. 휴일이라서 그런지 사람들이 북적이고, 머리 위에서 종이 성조기가 바람결에 흔들리고, 파란 하늘이 그 뒤로 배경처럼 펼쳐졌다. 한 어린이, 아이스크림과 풍선을 양손에 쥐고 간다. 그 모습에 비친 햇살은 평화로왔다. 또 커다란 물통 위, 매달린 의자에 누가 앉아 있었는데, 가을 운동회 때 오재미 던지기로 바구니를 터뜨리듯, 공을 던져 사람을 물에 빠뜨렸다. 빛바랜 사진처럼 즐기던 사람들의 웃음소리는 귓전에 남았고 그밖엔 지금 머릿속이 하얗다. 하지만 빌리지 풍경 만큼은 남아서 잔디와 나무 사이로 낮은 집들이 듬성듬성이 보였다. 그날 용산 미8군 영내에 들어간 일은 미국독립200주년(1976)기념일에 미군을 따라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나는 세들어 살던 집(공항동) 건넌방에 살림을 차린 미군과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휴일이면 쌍절곤을 돌리고 캔맥주를 얻어 마시거나 팝송을 흘려 들었다. 그이는 뽀얀 살결에 깨알 붉은 점이 얼굴에 팔뚝에 가득했으며 품성이 너그러웠다. 붉은 머리에 붉은 털, 지금 생각하니 아일랜드계 미군인 듯하나 그땐 알지 못했고 막 고교를 졸업하던 해였다. 

    인생에 자기 집짓기는 겨우 한 두 번 맞이할 일이란다. 그 조차 기회는 드물지만 집짓기에 치밀한 계획은 필수이다. 일의 규모와 계획에 따라서 방향이 정해지면 그다음은 시간 문제. 어쩌면 꿈이, 현실의 눈앞에 펼쳐진 감동을 경험하지 않은 이가 필설 할 일은 아니지만 때때로 우리는 일의 순서가 뒤틀려 괜한 수고를 치르곤 한다. 새 정부가 들어서며 말들이 많다. 청와대(개방에 앞서 근대문화유산으로서 일대의 사전조사가 없었다.) 이전 문제에 이어 용산공원 개방을 위한 일련의 일을 보면 앞뒤가 뒤바뀐 듯하다. 유독 기름 유출사고가 잦았던(1990~2015 기간동안 84회, 녹색연합 통계) 이 땅에 대한 정확한 조사가 먼저이고 그 다음의 일들이 뒤따라야 한다. 어느 공사 중에라도 유물이 나오면 즉시 중단하고 발굴을 끝마쳐야 비로서 공사가 재개된다. 역으로 문화재 지정을 앞둔 건물(스카라극장)이 헐렸다는 뉴스는, 제재를 받기전 사적 재산권을 행사한 경우이다. 이런 일들은 대개 공공이 개인의 이해를 제한하고 따라서 민간과 시민이 이를 따르는 법을 제도로 삼는 나라의 일이다. 이렇게 보면 ‘용산임시(영구)공원’ 개방을 둘러싸고 해결할 문제가 한 둘이 아니다. 환경정화처리비용 문제, 임의 결정사항이 아닌 군사시설 문제, 문화재 관련 사항, 방공 방호 경비, 시민의 의견 등을 제치고 너무 급히 나간다. 해당 관련 부처의 사전 노력을 수포로 돌리고, 인기에 소비될 수 없으며, 산적한 문제를 해결한 다음 후대의 유산으로 남아야 한다. 그래서 당대에 사용이 늦어도 좋을 미래의 땅으로 남아 제국과 이념이 갈라놓은 심연의 그늘진 땅을 회복해야 한다. 절호의 기회다. 당국자는 책임을 다해 국토를 관리할 의무를 지녔다. 정책의 방향과 계획의 일관성이 무너지면 당국의 신뢰는 땅에 떨어지고 만다.

    참조 및 인용: <용산, 빼앗긴 이방인들의 땅. 이순우. 민족문제연구소>

    _no.82 《와이드AR》 2022년 07-08

  • 옥탑방, 꿈을 키울 만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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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an 02, 2023

    김재경의 PHOTOSSAY 21

     

    우리 주변에는 틈새 공간이 많다. 눈여겨보면 자투리 땅에 심기운 상추도 보이고 파나 푸성귀를 심은 사람의 손길도 보인다. 꽃을 가꾸는 마음은 주변을 변화시켜 온화하고 따사롭게 하는 힘이 있다. 햇살 비치는 골목 담벼락 아래, 한 뼘 화단이나 스치로폼 박스는 식물을 키우고, 가까이 바람결에 흔들리는 메리야스와 빤스는 한가한 도심 주택지의 프로필이었다. 밀집된 고층아파트라면 이런 틈새 공간을 찾아내기 어려울 테지만 그동안의 밀집 주거지나, 일반 주거지의 사무실, 상점들이 뒤섞인 곳에는 어김없이 옥탑방이 있다. 일터에서 가깝고 싼 값에 삶의 공간을 마련하기 더없는 곳이며 남의 시선이나 방해를 받지 않고 혼자서 공간을 누리는 색다른 맛이 있다. 협소한 환경이 쾌적하다 할 수 없으나 학생, 직장인, 전문인, 혹은 신혼부부도 살림을 꾸리는 대안 공간을 자처한다. 싱글의 주거로 장점도 있으니, 널찍한 옥상마당의 전망은 답답한 일상에 활력을 준다. 누군가 경사지 높은 곳에 위치한 옥탑방을 얻었다 하면 펜트하우스 부럽지 않은 경관은 덤. 그런 옥상에서 채소를 가꾸고 화초를 키우는 사람, 평상에 나앉아 여름 더위를 식히는 사람, 빨래 너는 사람, 운동하는 사람 등 활용이 매우 다양하다. 고향을 떠나 도시로 찾아 들어온 사람이 편히 쉴 수 있는 장소이며 한 때의 꿈을 키우기에 적절한 공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옥탑방 생활은 그만큼 감내할 것이 많다. 옥탑방은 기존 건물에 덧붙여진 부차적인 공간으로, 스스로 해결해야 할 일이 많다. 덥고 추운 환경도 그렇지만 이미 경제적인 여유가 없기에 선택하는 공간인 만큼 넉넉한 생활의 여유는 찾아보기 어렵다. 60~70년대 산업화 시기에도 도시로 몰린 세대는 싸구려 단칸방을 찾거나 반지하 셋방을 찾아 다녔고, 일터의 환경이 군색해 간이 숙소든 아예 거기서 먹고 자는 형식이든 가리지 않은 것은 이들이 도시에서 기회를 찾았기 때문이다. 아픔이 따르나 그래도 가능성이 아주 없어 보이진 않았다. 대다수의 처지와 형편이 그랬듯이 이런 사회적 분위기는 당시의 문학작품에서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여전이 사회는 우리에게 도전의 대상이고 저마다 꿈과 좌절을 안고 살아야 하는 점에서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런 점에서 시간은 장소에 사건을 만들고 그 공간을 채운 이야기는 기억으로 남아 퍼져 나간다. 개인의 기억이 다수의 기억으로 번지듯이 특수는 보편으로 옮겨 간다. 이렇게 일반화된 체험은 어떤 사실 앞에서 우리의 감성과 이해가 찰라적 공감을 얻는 밑바탕을 이룬다. 서로 공감이 가능한 상식이 넘치는 사회는 열린사회, 너그러운 이해는 감사와 존중이 뒤따르는 식이다. 발레 파킹처럼 누군가 자발적 시민의 재치는 도시 주차난 해소에 기여하거나 포장마차, 푸드트럭이 지역에 활기를 불어 넣는 순기능이 좋은 예다. 이처럼 현실 에서는 공식(Formal)과 비공식(Informal)이 서로를 보충하며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따라서 옥탑에 붙어 사는 거주의 삶에서 자기 존재 곧 실존에 대한 탐문이 가능하다면 이는 전적으로 삶의 형식에 달렸을 터인데, 가진것이 적은 단순한 삶이야 말로 필수 조건에 가깝고, 그래서 자신을 소유할 수 있는 최상의 환경일 지도 모른다. 

    “멀리서 탑처럼 보인다 해서 붙은 옥탑방屋塔房의 법적 이름은 옥상옥이다. 원래 건물의 옥상 출입을 위한 계단 입구 또는 옥외 물탱크를 설치한 15평 가량 작은 방 형태의 구조물을 개조한 것이다. 수도법이 바뀌자(1990) 물통을 빼내고 그 자리를 정리한 후 얻은 여분의 공간이다. 허가받은 건축 면적과 용도에 기반한 세금 부과는 개조 후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따라서 옥탑방으로 개조 후 내놓은 월세는 알토란 같은 수입이고, 세제상의 이점을 챙기는 방식으로 진화했다. 그러나 이런 관행이 오래 갈수는 없었다. 법적 양성화 과정을 거치며 과세 대상이 되었고, 옥상 구조물을 항공사진으로 찾아내 과징금 또는 이행강제금 조로 세금을 매긴다. 그조차 요즘은 기왕의 주택지 재개발에 따른 주거지 변화와 수요 감소로 점점 줄어드는 추세다. 일반 주거시설에 비해 환경이 낮은 편이지만 2010년 이후 애초에 주거공간으로 지은 옥탑방은 신축 원룸, 투룸에 비해 거주의 쾌적성이 밀리지 않는다. 너른 옥상 마당으로 나가 바깥 바람을 쐬거나 가벼운 운동 그리고 빨래 건조에 탁월하다. 주변 경관이 좋으면 도시의 야경을 즐길 수 있으니 원룸에 비해 뛰어난 장점이다. 반면 여름철 내리쬐는 지붕의 복사열과 겨울철 한기는 거주자가 견디기 힘든 요건이다. 여름철 옥상에 물을 뿌리거나 지붕에 농업용 망사그물을 드리우고, 겨울철엔 비닐하우스를 덮는 두꺼운 비닐을 벽에 두르거나 우레탄폼과 스펀지 등으로 창문에 스미는 한기를 차단한다. 화재 때에 옥상으로 대피하는 출입문을 함부로 차단할 수 없다.”

    참조 및 인용 : [나무위키]

    _no.81 《와이드AR》 2022년 05-06

  • 중계본동 104번지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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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eb 07, 2022

    김재경의 PHOTOSSAY 20

     

    중계본동 '백사(104)마을'(노원구 중계본동 30-3번지 일대)이 올 초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서울시와 노원구, 서울주택도시공사(SH)는 '개발과 보전,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상생형 주거단지'(총 2,437세대: 공동주택 1,953세대, 임대주택 484세대)로 변신을 예고(2025년 완공)했기 때문이다. 낡은 저층 주거지의 특성과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는 방식의 개발, 백사마을 만의 차별화된 창의적 건축디자인이 나올 수 있도록 ‘특별건축구역’으로 지정해 부지를 총 28개 영역(공동주택용지 5개, 주거지보전용지 23개)으로 나누고, 총 15명의 건축가를 배치해 각기 다른 디자인으로 건축계획을 수립하도록 했다. 시 관계자는 “백사마을은 재개발로 인한 기존 거주민의 둥지 내몰림을 최소화하는 동시에 도심 내 대규모 주택공급이 가능함을 보여주는 상생형 주거지 재생의 새로운 모델”이며 “다양한 유형의 재생 모델을 지속적으로 발굴, 적용해 낙후된 주거환경을 개선해 나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일제강점기 이후 도시저소득층의 주거형태로 고착된 무허가 불량주택이 서울시 도시화정책 아래 철거민을 양산한 시기는 1960년대. 서울 인근의 적절한 구릉지를 정착지로 택했으며 백사마을이 이들을 수용하는 ‘이주민 정착지'로 지정된 해가 1967년이었다. 용산과 영등포, 청계천 등지에 살던 도시 빈민들이 이곳으로 내몰려 들어왔다. 한 가구당 8평 땅, 시멘트블록 200장, 천막1동이 지급됐다. 그게 전부, 나머지는 각자 알아서 해결하는 식이었다. 해가 바뀌며 이떤이는 뒤 늦게 들어와 터잡이로 살거나 또 누구는 값싼 땅을 매입해 공장을 운영하기도 했다. 저마다의 사정이 딱하지 않을 수 없기는 여기로 들어온 처지를 보아 짐작할 수 있으나 실제로 말을 들어보면 모두 삶이 힘겨운 사람들 뿐이었다. 비록 일제 식민기와 전후의 없던 시절에 어렵지않았던 이가 있을까 십지만 그중에 더욱 갈곳없던 이들이 살던 도심 외곽에 위치한 ‘이주민 정착지’이었다. "첫 이주민이 들어온 후 십여 년 지나자 마을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마을 초입에 시장통이 형성되자 사람들이 붐비고 활기로 가득했다. 하루에 몇번 오는 버스는 길게 늘어선 마을 사람들로 가득찼다. 그 무렵에 전기가 들어왔으나 물은 공동 우물에서 길어다 먹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교통이 불편하고 살림은 옹색했어도 맑은 공기와 자연 속에서 따뜻하고 끈끈한 공동체 생활이 이어졌다."(노원구 소식지)

    “그때 동대문 막살이집촌에 살다가 불이 나는 바람에 집을 잃었지. 판자촌이니 순식간에 재가 됐어. 다른 이웃들과 80여 명이 여기로 흘러 들었어. 나랑 남편도 4남매를 데리고 왔는데 천막 하나 내준 게 고작이었어.”(최ㅇㅇ 88세) “남은 사람 중 여기 계속 살 수 있는 사람은 열에 서너 명도 안될 것”이라며 “새 아파트 추가 분담금이 3~4억원 정도로 예상되는데 실제로 그렇다면 입주권을 팔고 서울을 벗어날 수밖에 없다. 정부에서 융자를 해준다고 해도 나이 먹은 사람은 평생 갚아도 못 갚는다. 이 동네 사람들의 한이 될 것.”(김ㅇㅇ 60세) 주민대표회의 위원장(황ㅇㅇ)은 “분담금 때문에 다른 곳으로 이주하는 일은 어느 재개발이나 다 있다”며 “조합원 분담금도 지금 아파트 시세에 비해서는 엄청 싼 금액이고 차액이 있으니 그걸로 또 집을 장만할 수도 있어서 쫓겨나는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이어 “중도금, 잔금 대출은 SH나 시공사에서 도와줄 것”이라며 “외부인들이 들어오는 것도 있는 사람들이 여윳돈을 갖고 사는 건데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지역, 풍토, 관습 그리고 무엇보다 시간에 따라서 삶의 양태가 다를 수 있다면 주거는 이를 잘 드러내 보이는 것들 중 하나이다. 춥거나 더운 지역은 물론이고 온화한 지역도 생활방식의 차이와 문화는 그 흔적을 그대로 집에 새긴다. 삶이 평탄한 태평시대나 그렇지 않더라도 그 시기 집의 양식, 장식 또는 가구와 집기 등 크게 보아 일상과 예술적 활동의 성과로 남아 후대 사람들에게 말을 전한다. 삶은 고정되기 보다 흔들려 불안한 것이고 사건 사고의 집합은 진보의 노정 그 자체이다. 시대 속에서 부대끼거나 역으로 밖에서 어느 시대를 조망한다는 사실은 현실과 비 현실 만큼 격차가 클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삶의 골격과 살을 이루는 집은 지금 여기 우리의 얼굴 그 자체에 다름아니다 할 수 있다. 몇 십년 동안의 시대적 요청 아래 대량 상품으로 바뀌어 버린 작금의 주거 현실, 누추한 곳을 지우고 아파트단지로 가득찬 도시, 그 바탕의 모습을 기록한다. 처음 관이 주도해 이주민을 소개했던 장소에 주민 스스로 건물을 지었고 섬유질 같은 거주의 원초적 갈망이 보이는 ‘자생적 정착지’로 남은 까닭이다.

    참조 및 인용: <서울시 도시재생실주거재생과 자료>, <서울 중계동 백사마을의 건축적 특성 연구_장용해,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경향신문] [동아일보] [위클리 리포트] 

    _no.80 《와이드AR》 2022년 01-02